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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포트=최민준 기자] 시간의 궤적 속에서 인간은 늘 지난날의 후회에 얽매이거나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삶의 황혼기에 다다른 이들에게 ‘현재’라는 시간은 종종 지나쳐온 나날의 부산물이거나 그저 견뎌내야 할 잔여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12일 개봉한 김태휘 감독의 장편 데뷔작 ‘빈집의 연인들'(The Burglars)은 이러한 통념에 조용한 반기를 든다. 까칠한 외톨이 은자와 다정한 빈집털이범 팔복이 펼치는 뜻밖의 여정을 통해, 영화는 삶의 어느 순간에도 새로운 인연과 설렘이 싹터 현재를 비출 수 있음을 진솔하게 증명해 낸다. 단편 ‘서리다’, ‘살아나’ 등을 통해 인물을 향한 다정한 시선과 섬세한 미장센을 선보여 온 김태휘 감독은 이번 첫 장편 영화에서도 특유의 따뜻한 연출 기법을 발휘하며 관객의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린다.


▲ 결핍과 결핍이 빚어낸 찰나의 온기, 청춘 2회차의 서막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단연 두 베테랑 배우 정애화와 기주봉이 완성해 낸 압도적인 티키타카 케미스트리다. 영화 ‘갈매기’로 제9회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럭키, 아파트’, ‘아침바다 갈매기는’ 등 독립영화계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해 온 정애화는 마을 공식 외톨이 은자 역을 맡아 까칠한 겉모습 속에 숨겨진 감정의 결을 세밀하게 표현해 낸다. 영화 ‘강변호텔’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와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쓸어 담았던 기주봉 역시 시골 빈집을 유랑하는 다정한 빈집털이범 팔복으로 분해 특유의 깊이 있는 내공으로 극의 몰입감을 더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인물은 여정을 동행하며 서로에게 은밀하게 스며든다. 이들의 만남은 통상적인 노년의 로맨스라는 틀에 갇히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단순한 황혼의 사랑으로 제한하기보다, 삶의 후반기에 다시 마주한 ‘청춘 2회차’의 성찰로 풀어낸다. 은자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결핍과 상처는 팔복이라는 뜻밖의 자극을 만나 비로소 균열을 일으키고, 그 균열 사이로 잊고 지냈던 자유와 설렘의 감정이 새어 나온다. 거창한 사건이나 과장된 연출 없이도 두 배우가 나누는 눈빛과 유쾌한 티키타카는 인생 만렙 커플의 일탈을 온기 가득한 금빛 로맨스로 승화시킨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사는 날 선 경계심에서 시작해 점차 둥글게 깎여나가는 감정의 변화를 선명히 대변한다. 수십 년간 다져진 배우들의 연기 호흡은 억지스러운 눈물이나 과도한 자극 없이도 보는 이의 감흥을 끌어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서로의 쓸쓸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장면이나, 텅 빈 집 마루에 앉아 함께 바람을 쐬는 순간들은 이 영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정점을 보여준다.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온전한 현재를 이루듯, 두 인물의 동행은 삶이란 결국 거창한 목적지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나눔에 있다는 고결한 사실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 길 위에 새긴 전북의 풍경, 공간이 들려주는 다정한 안부
‘빈집의 연인들’이 지닌 또 하나의 커다란 미덕은 전라북도 전역을 배경으로 한 올로케이션 촬영이 선사하는 리얼리티와 정서적 깊이다. 전주를 비롯해 익산, 임실, 부안, 완주 등 전북의 방방곡곡은 단순한 일상의 배경을 넘어 은자와 팔복의 여정을 완성하는 숨은 주인공으로 기능한다. 화려하게 조형된 세트가 아닌, 실제 주민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오래된 집과 골목, 한적한 들판과 마을 회관, 장터와 기차역은 영화에 거친 생동감과 보편적인 친근함을 부여한다.

자연스러운 풍광과 낡은 공간들이 품고 있는 정취는 두 인물이 느끼는 감정의 궤적과 오버랩되며 관객들에게 깊은 위로를 건넨다. 삶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이들이 로컬 시네마의 진솔한 공간 속을 거닐 때, 관객 역시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현재라는 시간을 따스하게 포용하게 된다. 카메라가 묵묵히 담아내는 정겨운 풍경들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까지 시골 마을의 서정적인 온기를 그대로 배달한다. 인공적인 조명 대신 자연 광선이 은은하게 감도는 화면 속에서, 인물들의 여정은 더욱 진실하고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김태휘 감독은 지나간 과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마음을 빼앗긴 현대인들에게, 짧지만 소중한 인연이 어떻게 한 사람의 오늘을 다정하게 바꾸어 놓는지 담담하게 보여준다. 인물의 상처를 후벼 파서 비극을 극대화하기보다는 그 상처 위에 볕을 쬐어주는 방식을 택한 연출관은 이 영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오늘(12일) 전국 극장에서 관객들을 맞이한 ‘빈집의 연인들’은 보는 이들에게 긴 여운과 함께 삶을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묵직한 희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최민준 기자 / 사진= 영화 ‘빈집의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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