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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환경에서 더 빛난 진짜 연상호의 세계…사색을 유도하는 영화 ‘실낙원’

강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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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포트=강해인 기자] 연상호 감독이 ‘얼굴’에 이어 저예산 프로젝트를 통해 작품 세계를 넓혔다.

지난 5월 개봉한 ‘군체’는 좋은 성적과 달리 애니메이션 때부터 연상호 감독의 세계를 따라오던 입장에서 아쉬웠던 영화다. 인간의 심연을 비추며 불쾌함을 맛보게 한다는 점은 유사했지만, 이야기나 메시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집단화된 감염자라는 설정을 제외하면 ‘군체’는 ‘부산행’ 보다 흥미로웠던 요소가 적었다.

‘돼지의 왕’·’사이비’ 등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이기심, 추악함, 방관하는 소시민 등 인간의 딜레마와 부끄러운 면을 조명하며 관객을 찝찝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했다. 실사 영화에서도 이런 요소는 남아 있었으나 점차 캐릭터들이 평면적으로 변하고 정형화되어 걸 목격할 수 있었다. 하나의 성격만이 부각되고 그것이 도구적으로 소모되는 탓에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부산행’ 이후 실사 영화 작업에서 연상호 감독은 안타고니스트를 통해 정치·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자주 부각했다. 힘을 가진 집단과 거대한 시스템의 욕망을 비판하며 영화의 온도를 올렸다. 덕분에 영화는 이해하기 쉬웠고, 빌런을 향해 관객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카타르시스도 높일 수 있었다. 이렇듯 그의 상업 영화는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이야기·주제 등으로 유사한 요소를 반복하고 있었고, 메시지 역시 날카롭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에 개봉한 ‘얼굴’을 만난 뒤 다시 연상호 감독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타인의 소문에만 의존해 부인을 규정하고, 볼 수 없음에도 외모에 집착하던 장님의 모습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어두운 욕망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모처럼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찝찝한 질문과 함께 인간을 향한 고민을 유도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애니메이션을 연출할 때와 비교하면 덜할 수는 있지만, 연상호 감독의 칼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이번에 개봉한 ‘실낙원’은 날카로움보다는 연상호 감독의 인간을 향한 호기심이 돋보였던 영화다. 9년 만에 살아 돌아왔지만 어딘가 서늘한 아들 류선우(배현성 분)에게 어머니 류소영(김현주 분)은 마음을 열지 못한다. 영화는 혈육을 얼마나,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AI로 구현된 완전무결한 아들과 현실의 불편한 진짜 아들이 대비하며 개인의 욕망이 투영된 판타지를 현실보다 선호하게 될 미래를 향해 경고장을 던졌다.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많은 것을 끌어온 덕분에 이 작품 역시 낙원에서 추방되는 인간의 이야기가 중심에 있다. 영화 내에서 낙원과 지옥,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에 관한 메타포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빛과 어둠, 상승과 하락의 이미지 등을 통해 인물들이 서 있는 곳을 표현했다. 영화를 움직이는 동력은 ‘질투’다. 납치범이 소영에게 사랑받는 선우를 질투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인간이 AI를 질투하는 구도로 변주되고, 이후 인간이 추락하고 파멸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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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모티브와 충격적인 사건이 있음에도 ‘실낙원’은 몇 가지 큰 결점이 있다. 우선, 선우가 9년간 돌아오지 못했던 시간을 관객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 선우의 성격이 급격히 변하고, 사회와 격리됐던 유년기를 공백으로 두면서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아들과 만난 소영의 반응도 나름의 설정이 있긴 하지만 바로 와닿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연 이어 일어나 극에 이입이 쉽지 않다.

결정적으로 악으로 물든 아들과 AI로 대체된 아들의 에피소드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두 선우는 각각의 서사와 메시지를 갖고 있어 따로 떼어놓고 보면 흥미롭다. 그러나 ‘실낙원’이 전개될수록 두 서사는 서로 간섭하고, 천국과 지옥이라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 결국에는 한 데 모인다. 이때 두 요소가 충돌할 때마다 이야기가 끊기고 정체된 느낌을 준다. 결과적으로 별개의 요소를 억지로 이어 붙인 것으로 보였다.

이런 아쉬움이 있지만, ‘실낙원’은 연상호 감독의 작가주의적 색채를 다시 확인할 수 있어 반가웠던 작품이다. AI와 현실의 충돌,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 등은 영화가 끝난 뒤에 대화를 유도할 수 있는 흥미로운 요소였다. 연상호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AI와 인간의 차별점이 사색이라고 말했는데, ‘실낙원’은 관객을 사색하게 하며 영화의 역할을 확장한다. 모호한 요소가 영화에 균열을 만들기는 하지만,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었다.

‘얼굴’과 ‘실낙원’을 통해 연상호 감독이 제작비가 큰 영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두 작품을 관람하며 비판받을 지점을 예상하고 있음에도 어떤 선을 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것이 ‘군체’ 때 느꼈던 아쉬움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상업 영화에서 제작비를 고려해 대중성을 고려해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유독 연상호 감독의 큰 영화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휘발성 강한 재미를 택한 대신 완성도에 결함이 있었고, 때문에 실관람객 평도 썩 좋지 못했다.

어쩌면 연상호 감독의 작품을 탐구할 때 ‘얼굴’과 ‘실낙원’ 같은 저예산 영화를 구분해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터뷰에서 그는 ‘실낙원’의 인물을 완벽히 설명할 수 있었다면 상업 영화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연상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작업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조금 더 자주 듣고 싶다. 더불어 초저예산으로 제작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도 한국 영화계가 꼭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실낙원’은 잘 세공되지 못한 점이 분명 눈에 밟히지만, 인간의 심연을 겨냥하고 사유를 유도하는 진짜 연상호의 세계를 마주할 수 있어 즐거웠던 영화다.

강해인 기자 khi@tvreport.co.kr / 사진=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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