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STREET] ‘멋진 어른’을 물건 하나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본인 명의 건물 제외). 비싼 차, 지갑, 시계, 멋진 정장, 최신 IT기기 등 여러 가지 고급 아이템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에디터 LEE는 단연 ‘만년필’ 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린 시절 카탈로그에서 몽블랑 만년필 사진을 보고 홀딱 반해버린 이후 내게 있어 만년필은 우아한 어른의 상징이 됐다. 윤이 차르르 흐르는 매끄러운 펜대에 장인이 일일이 손으로 무늬를 새겨넣고 금으로 장식한 펜촉. 백만원을 가볍게 뛰어넘는 가격까지… 연필 꼭 쥐고 ‘받아쓰기’에 매진하던 어린이는 그 명품을 보며 생각했다.나중에 스무 살 돼서 돈 많이 벌면 나도 이거 사야지!아… 그렇다. 여기서 같이 탄식해 주시면 되는 타이밍이다.
스무 살은 이미 한참 전에 넘었고 내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지만 아직도 몽블랑 만년필을 사지 못 했다. 사실 사고자 하면 못 살 가격은 아니긴 한데(2020년 9월 기준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골드 코팅 클래식 만년필은 72만 원이다) 아직 엄두가 안 나는 걸 보니 멋진 어른이 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나 보다. 그 때까지는 실용적인 만년필로 예행연습을 해야겠다.
어라 그런데 웬걸. 지갑 얇은 직장인은 물론 학생도 살 수 있을 만큼 저렴하면서 필기감도 좋고 예쁜 제품들이 많은 게 아닌가. 직접 쓰기에도 좋고, 아날로그 감성을 아는 지인에게 선물로 주기에도 적당한 20만 원 이하의 만년필들 중 에디터 LEE의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봤다.
‘입문용 만년필이라면 역시 ‘라미(LAMY)’’
독일 국민 만년필이라고 할 정도로 널리 쓰이는 제품. 가격대가 저렴하고 실용적인 데다 알록달록 다양한 컬러감 덕분에 고르는 재미도 있다. 고풍스러운 만년필 디자인이 왠지 올드하게 느껴져 취향에 맞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라미 브랜드의 톡톡 튀는 컬러가 확실히 눈에 들어올 듯.학생이나 입문자도 쓰기 적당한 가격대라 가성비 최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디터 LEE는 사파리 파스텔 시리즈 중 민트색을 구매해 집에서 쓰고 있다. 카페에서 받은 판촉물 메모지에 온라인 쇼핑할 목록을 적고 있을 뿐인데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 단, 손으로 잡는 부분이 삼각형으로 각져 있어서 개개인의 필기 습관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다.
‘국산의 저력, 모나미 투명 만년필’
이 정도면 디자인과 감성, 가성비까지 다 잡은 문구라고 봐도 될 것 같다. 2019년 11월 출시된 모나미 라인만년필은 몸통이 투명해서 안에 들어있는 잉크 잔량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게 특징. 독일 보크사의 EF펜촉(extra fine, 매우 가느다란 필기가 가능한 펜촉)을 사용해 가늘고 깨끗한 필기가 가능하다. 공부하느라 필기를 많이 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적합할 것 같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좋은 도구가 있으면 더 즐겁게 작업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매일 쓰던 샤프와 볼펜 대신 이 만년필로 필기하면 기분 전환 확실히 되겠다. 라미나 모나미 만년필처럼 캐주얼한 디자인에 가격까지 착한 만년필들에도 단점이 있으니, 하나 사면 평생 쓸 수 있다는 의미로 ‘만년’필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여러 자루 사 모으고 싶어진다는 점.
‘튼튼하고 오래 쓸 만년필을 원한다면 펠리칸(PELIKAN)’
1800년대부터 지금까지 내구성 좋고 실용적인 만년필을 생산하고 있는 독일 브랜드 펠리칸이다. 펠리칸 만년필은 잉크 흐름과 펜촉 탄력성이 좋은 데다 크기도 큰 편이라 시원시원하게 필기할 수 있다. 섬세하고 장식적인 만년필보다는 실용적이고 튼튼한 만년필을 원한다면 펠리칸이 좋은 선택이다. 군더더기 없는 블랙 디자인은 보기에 따라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스타일이 유행을 타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장식적 요소가 있는 골드마블 모델이 탐나는데, 배럴에 은은한 펄감과 색감이 들어가 있어 세련미와 개성을 다 잡은 모델이다. 10만 원 대 중반으로 가격대도 준수하다.
‘김정은도 이기지 못한 ‘미제’의 매력, 크로스(CROSS)’
크로스는 백악관 공식 필기구 브랜드로, 오바마와 트럼프도 서명할 때 크로스 만년필을 쓴다고 한다. 북한 김정일도 크로스 마니아로 소문날 정도로 이 브랜드 필기구를 애용했다고. 얼마나 좋기에 ‘미제’ 물건임에도 거리낌 없이 쓴 것일까?
최고권력자들이 쓰는 고급 모델이야 당연히 비싸지만 크로스는 중저가 라인도 준수하게 나오는 브랜드다. 센츄리2 메달리스트 3309는 날렵한 볼펜 같은 디자인이라 만년필의 두툼한 느낌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할 만 하다. 은색 몸통에 금빛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모양새가 참 마음에 든다. 내 필통 안으로 쏙 들어가 줬으면 좋겠다.
‘세련된 사회인 느낌 가득, 워터맨’
1883년 뉴욕에서 보험 외판원으로 일하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은 중요한 순간에 펜의 잉크가 흘러내리는 바람에 계약을 날리고 말았다(참 예나 지금이나 사는 게 쉽지 않다). 이 날의 분노와 슬픔을 발명으로 승화시킨 워터맨 씨. 통짜였던 펜촉 가운데에 길게 홈을 파 내었더니 잉크 쏟아질 걱정 없이 균일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는 이 발명을 바탕으로 최초의 만년필 회사를 차렸다. 창립자도 미국인이고 원래 본사도 미국에 있었지만 추후 프랑스 지사가 본사를 인수하면서 워터맨은 프랑스 브랜드가 됐다.
그런 워터맨에서 올해 초 10년 만에 새로운 모델 ‘엠블렘’을 내놓았는데 현대적인 디자인에 가격대도 합리적이다. 워터맨 만년필은 최초의 만년필을 만든 회사의 제품답게 기본이 탄탄하고 오래 써도 사용감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엠블렘은 기본 라인과 디럭스 라인으로 나뉘어 출시됐으며 디럭스 라인은 기본라인보다 배럴(몸체) 등이 조금 더 고급스럽게 마무리됐다.
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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