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리포트=강지호 기자] “내 영화의 모든 끝은 일관되게 하나예요. 행복을 위한 불행”
‘왕의 남자’부터 ‘동주’, ‘박열’, ‘자산어보’까지. 수많은 비극을 스크린에 담아온 이준익 감독이 자신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가 첫 세로형 시네마 ‘아버지의 집밥’에서 다시 한번 바라본 것도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그 안에 자리한 ‘아름다운 비극’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지난 9일 서울 성동구 키다리스튜디오 사옥에서 TV리포트와 만나 세로형시네마 ‘아버지의 집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의 집밥’은 40년 동안 삼시세끼 집밥만 찾던 아버지 하응(정진영)이 ‘요리백지증’에 걸린 아내 순애(이정은)를 대신해 생애 처음 부엌에 들어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이준익 감독의 첫 숏폼이자 세로형 시네마 작품이다.
숏폼 형식은 이준익 감독에게도 처음.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정서는 그가 오랫동안 영화를 통해 이야기해 온 세계와 맞닿아 있었다. 이날 이 감독은 ‘아버지의 집밥’에 대한 개인적인 만족도가 높다고 밝히며 “일단 이야기가 내 나이에 맞는 이야기”라고 웃어 보였다. 젊은 시절의 하응과 순애부터 세월이 흘러 노년을 맞은 두 사람까지 한 부부의 긴 시간을 따라가는 이야기가 현재 자신의 나이와도 맞닿아 있다고.
그는 젊은 하응과 순애, 노년의 하응과 순애를 각각 ‘성장’과 ‘성숙’이라는 단어로 구분했다. 이 감독은 “모든 인간은 성장의 시기와 성숙의 시기를 거친다”며 “젊은 하응과 순애에게는 성장의 아픔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정진영과 이정은이 된 두 사람이 성숙의 시기를 통과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장과 성숙을 젊은 두 주인공과 나이 든 두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 결국 일종의 비극을 맞이하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그 과정에서 이준익 감독이 특히 마음에 품은 장면도 있었다. 젊은 하응이 밖에서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아내 순애가 아이와 함께 멀리서 지켜보는 순간이다. 순애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다 아이의 눈을 조용히 가린다.
이 감독은 “젊은 순애의 눈빛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싶다”며 “남편의 굽지 않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있다”고 당시 장면을 짚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장면은 이후 하응이 집에서 밥상을 엎는 사건과도 이어진다. 행동만 놓고 보면 가족에게 분노를 쏟아낸 가장이지만, 그날 하응이 겪었던 수모와 이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켰다는 서러움까지 알고 나면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감독은 “그런 날이 하루뿐이었겠나. 계속 있었을 것”이라며 “그런데 그날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모습을 봤다. 그게 너무 힘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순애는 그날을 기억한다. 이 감독은 노년의 순애가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을 짚으며 부부 사이에 쌓인 시간은 어느 한쪽의 잘못만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바라봤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준익 감독 자신 역시 인물들의 실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오래 산 사람일수록 실수를 더 많이 했다”며 “그 실수가 생각나는 것이다. 밥상을 엎었다는 행동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런 종류의 감정들이 있다”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한 사람의 행동 뒤에 놓인 시간을 따라가는 것은 이준익 감독이 오랫동안 영화를 통해 사람을 바라봐 온 방식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집밥’ 역시 순애의 병이 기적처럼 낫거나 하응과 가족들의 삶이 완벽하게 달라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준익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비극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비극을 통과한 사람에게 무엇이 남느냐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전작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왕의 남자’는 결국 모두가 불행해졌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왜 행복한 마음이 들까. ‘라디오스타’도 그 사람들의 인생에서 좋아지는 게 없다. ‘동주’는 죽었다. 그런데 왜 그 젊음은 아름답게 남아 있나. ‘박열’도, ‘자산어보’도 마찬가지다.”
이어 이 감독은 “내 영화의 모든 끝은 일관되게 하나”라며 “행복을 위한 불행”이라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정의했다. 그는 “내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성공하거나 이전보다 나은 삶을 갖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전과 똑같거나 오히려 더 안 좋아진다”면서도 “그런데 왜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나는 그게 영화의 마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행복을 위한 불행’은 이준익 감독이 오랫동안 품어온 ‘아름다운 비극’이라는 영화관으로 이어졌다.
이 감독은 “나는 비관론자이자 운명론자”라며 “어차피 인생은 비극이다. 죽음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비극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왕의 남자’ 포스터의 헤드 카피도 ‘아름다운 비극’이었다”며 “내가 만드는 비극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을 목표로 한다. 내 모든 영화는 아름다운 비극”이라고 미소 지었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비극적인 현실을 지우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아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데 가까웠다.
이준익 감독의 시선은 영화 속 인물을 넘어 인간의 삶과 죽음 자체로 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의 죽음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며 “그 사람이 성공해서 죽든, 실패해서 죽든 모든 죽음은 아름다워야 인간이 존재로서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는 스크린 속 인물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느덧 60대 후반에 접어든 이준익 감독은 자신의 삶의 끝 역시 종종 떠올린다고 털어놨다.
그는 “내가 죽는 날을 항상 상상한다”며 “잘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잘 죽는 것이다. 잘 죽는다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나도 잘 죽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름다운 비극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라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죽음을 바라보기에 삶을 비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끝이 정해져 있기에 그 끝에 도달하는 과정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바라보는 쪽에 가까웠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끝내 성공하지 못하거나 삶이 나아지지 않더라도 그 시간이 아름답게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에게 ‘아름다운 비극’은 작품을 설명하는 수사가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태도이자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카메라가 담는 방식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아버지의 집밥’ 역시 마찬가지다. 하응과 순애는 늙고, 기억은 희미해지며, 누구도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지나온 성장과 성숙의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인생의 끝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남는 질문은 하나다. 그 비극을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낼 것인가. 그리고 변함없이 이 질문을 담아온 이준익 감독의 시선은 ‘아버지의 집밥’ 위에 조금은 색다른 형태로 담겼다.
‘아버지의 집밥’을 통해 이준익 감독이 또 한 번 그려낸 ‘아름다운 비극’은 지금 롯데시네마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후 영화는 17일 오후 5시 1부, 24일 오후 5시 2부가 레진스낵에서 숏폼 형태로 순차 공개된다.
강지호 기자 / 사진= 레진스낵, 영화 ‘아버지의 집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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