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리포트=강지호 기자] 배우 정진영은 자신이 출연한 ‘아버지의 집밥’을 ‘잘 발효된 멜로’라고 정의했다. 정진영의 표현을 빌려 바라본 그의 연기 역시 오랜 시간 잘 발효됐다. 정확한 답을 찾아 헤매던 시기를 지나 이제 그는 인물을 통째로 느끼고, 연기하는 순간 자체를 즐기는 배우가 됐다.
정진영은 지난 4일 서울 성동구 키다리 스튜디오에서 TV리포트와 만나 세로형 시네마 ‘아버지의 집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아버지의 집밥’은 평생 가족이 차려준 밥을 먹어온 아버지가 처음으로 직접 밥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자산어보’, ‘동주’, ‘왕의 남자’ 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처음으로 숏폼 연출에 도전했으며 정진영, 이정은, 변요한 등이 출연했다.
정진영은 극 중 40년간 집안의 절대 권력자로 살아온 아버지 하응을 연기했다. 하응은 아내 순애(이정은)가 차려주는 밥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지만, 어느 날 갑작스럽게 부엌에 들어가 난생처음 요리를 시작한다. 서툰 집밥을 만드는 과정에서 하응은 당연하게 여겼던 가족의 일상과 아내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처음 하응을 만난 정진영은 캐릭터를 복잡하게 분석하기보다 그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했다. 이는 정진영이 최근 10여 년간 연기를 대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연기를 두고 “예전에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이 사람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행동할 수 있지?’라는 이유를 찾아서 그것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돌아봤다.
당시 정진영이 추구했던 것은 이른바 ‘정확한 연기’였다. 인물을 분석해 답을 찾아낸 뒤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왜’라는 질문에 집착하지 않고 연기를 하게 된 지 한 10년밖에 안 됐다. 그때부터 연기가 좀 달라졌다”고 밝혔다.
이제 그의 질문은 ‘왜’에서 ‘어떤 상태인가’로 달라졌다. 정진영은 “‘이 사람은 어떤 상태이지?’, ‘나는 어떤 상태이지?’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며 나이를 먹을수록 분석보다는 직관적인 느낌을 믿게 됐다고 설명했다. 행동마다 이유를 찾아 붙이기보다 한 사람의 상태와 감정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과거에도 예외는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을 연기할 때였다. 정진영은 “그때는 ‘왜’라는 질문보다는 그 슬픔을 통으로 접근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다만 당시의 경험이 곧바로 연기 방식 전체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오랜 시간 분석을 거쳐 인물의 답을 찾아갔고, 약 10년 전부터 조금씩 그 습관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정진영은 지금의 변화를 “이제는 산수를 안 한다”는 말로 압축했다. 과거에는 인물의 감정을 세세하게 계산했다면 지금은 “그냥 통으로 느낀다”고 했다. 화가 난 상태라면 분노에, 슬픈 상태라면 슬픔에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다.
배우로 살아온 방식도 비슷했다. 정진영은 자신의 지난 시간을 정상에 오르는 ‘등산’이 아닌 주변을 천천히 바라보는 ‘산책’에 비유했다.
그는 “나는 등산처럼 연기자로 살아오지 않은 것 같다. ‘어디까지 올라가야지’, ‘얼마큼 빨리 가야지’라는 생각을 안 했던 것 같다”며 “그냥 산책하는 마음으로 몇십 년 연기를 해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산책을 하면 천천히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미소 지었다.

그런 정진영이 ‘아버지의 집밥’에서 가장 중요하게 바라본 것은 하응과 순애의 관계였다. 가족의 이야기이자 요리에 도전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지만, 정진영에게 두 사람의 서사는 무엇보다 ‘멜로’였다.
그는 “멜로인데 앞에 어떤 형용사를 붙여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며 한참 고민하다가 ‘잘 발효된 멜로’라는 표현을 꺼냈다. 그의 말처럼 ‘아버지의 집밥’ 속에는 발효된 멜로가, 발효된 애(愛), 발효된 정성이 함께했다.
하응과 순애에게는 분명 사랑했던 시간이 있었지만 긴 결혼 생활을 거치며 그 감정 역시 달라졌다. 정진영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은 두 사람이 오래전 품었던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을 멜로로 바라봤다. 특히 그는 멜로 연기에 대해 사랑의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라며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장르라는 생각을 전했다.
그가 하응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인물을 쉽게 단죄하지 않으려는 태도도 담겼다. 하응이 가족에게 권위적으로 행동해 온 인물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그 역시 살아온 시대와 방식이 있는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작품이 하응의 뒤늦은 요리 도전을 통해 보여주는 변화 역시 거창한 반성보다 일상의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됐다.
수십 년 연기를 이어온 정진영에게도 변화는 그렇게 찾아왔다. 연기법을 어느 날 완전히 뒤집은 것이 아니라 작품과 인물을 거듭 만나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질문을 하나씩 덜어냈다. 그 과정에서 연기를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정진영은 “여전히 연기는 힘든 거지만 나이 먹을수록 연기가 재미있다. 젊을 때보다 요즘 연기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에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지금은 그 부담을 조금 내려놓았다. 그는 “요즘에는 ‘잘해야 돼’라는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실력만큼 하는 거지 뭐”라며 “나는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대신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남기는 것이 중요해졌다. 정진영은 “‘저 사람만의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일 행복하다”며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하면서 하자는 생각이다. 어렵지만 재미있는 것, 그것처럼 기묘한 일이 없다”고 연기를 향한 여전한 애정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집밥’에서 하응과 순애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정진영이 찾아낸 단어는 ‘발효’였다. 처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을 통과했기에 비로소 생기는 맛이 있다는 의미다. 젊은 시절 정확한 답을 찾던 정진영 역시 수십 년을 산책하듯 걸어오며 자신의 연기를 바꿔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이 먹을수록 연기가 재미있다”는 그의 말처럼 정진영은 지금도 배우로서 천천히, 자신만의 맛으로 발효되고 있다.
잘 발효된 정진영의 멜로를 만나볼 수 있는 세로형 시네마 ‘아버지의 집밥’은 오는 9일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한다. 이후 17일 오후 5시 1부, 24일 오후 5시 2부가 레진스낵을 통해 순차 공개될 예정이다.
강지호 기자 / 사진= 레진스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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