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수정 기자] 이제 하정우는 충무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늘 상대 배우와 감독에게 넘치는 영감을 안겨주는 그는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장르요, 브랜드다. 영화 ‘터널'(김성훈 감독)은 하정우라는 배우, 더 나아가 자연인으로서 그가 지닌 매력에 많은 부분 의지하는 작품이다. 전작 ‘끝까지 간다’로 장르 비틀기 신공을 선보인 김성훈 감독은 차기작 ‘터널’에서 재난 영화에 블랙 코미디 DNA를 녹여내 전에 본 적 없던 새로운 결의 영화를 탄생시켰다. 그 결과 700만 돌파를 눈앞에 두며 장기 흥행 중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능글맞은, 달변가, 유쾌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하정우가 있다.
‘터널’은 무너진 터널 안에 고립된 남자 정수와 그의 구조를 둘러싸고 변해가는 터널 밖의 이야기를 그린다. 위기 상황에 온힘을 다해 짜증내는 하정우의 모습이 아이러니한 재미를 유발한다. 김성훈 감독 특유의 유머 감각과 하정우가 지닌 유쾌한 매력이 어우러졌기에 유머의 타율도 높을 수 있었다. 애초에 하정우를 염두에 두고 기획한 영화가 아닌가 싶을 만큼 이 영화에서 정수와 하정우는 완벽히 포개져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한다.
‘터널’은 하정우가 혼자 이끌어가는 몫이 상당하다. ‘더 테러 라이브'(김병우 감독)에서도 라디오 스튜디오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작품을 이끈 바 있지만, ‘터널’의 공간은 그보다 훨씬 더 비좁고 어두웠다. 분량 대부분이 어두운 클로즈업 샷임에도 피로도가 적었던 건 하정우의 다채로운 표정 연기와 배우 본연이 지닌 매력 덕분이다. 미술과 소품에 공을 들인 하정우와 김성훈 감독의 디테일도 빛을 발했다. 이를테면 조기축구 가방 안에 어떤 소품이 들어있느냐에 따라 정수, 그리고 영화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걸 두 김성훈은 본능적으로 느꼈단다.
■ 다음은 하정우와 일문일답
-터널 안에서 혼자 이끄는 몫이 많았다. 부담감은 없었나
오히려 ‘더 테러 라이브’는 올곧이 스튜디오 내부의 이야기만 그리니까 부담감이 더 컸다. ‘터널’은 터널의 밖에서 (오)달수 형과 (배)두나가 균형을 맞춰주니 걱정은 적었다. 터널 밖의 상황이 감정적으로 힘드니까 터널 안에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리액션해줄 배우가 없었다.
그래서 미술 세팅과 소품에 엄청나게 집착했다. 예를들면 조기 축구 가방 안에 뭐가 들었냐에 따라 연기하는 게 달라지잖아. 워셔액이 어떻겠냐고 내가 먼저 제안했지. 탱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차 안의 공간에 적응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최대한 주변 환경과 소품을 활용하려고 했다.
-터널 밖의 상황은 무척이나 뜨거운 반면 터널 안 정수의 태도는 경쾌하기까지 하다.
상황이나 태도는 여유가 있지만 외모만큼은 고통스러운 환경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영화에 잘 티가 안 나서 속상한 부분인데, 영양사가 만들어준 프로그램대로 체계적으로 체중감량했다. 애초에 정수가 마냥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기만 했다면 ‘터널’에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난영화는 계속해서 복선이 깔리고, 재난이 터지고 주인공이 고통받고 엔딩으로 치닫게 되는데 ‘터널’은 영화 시작 5분 만에 터널이 무너진다. 나머지 1시간 50분을 어떻게 끌고 가냐의 싸움이었다. 그 안의 여러 포인트를 희로애락과 여러 결로 표현하는 게 관건이었다.
-과연 이정수는 어떤 사람이기에 극한의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 않을 수 있었을까
편집된 장면이 있다. 원래는 주유소에 가기 전 생일 케이크를 사려고 빵집에 들리거든. 거기서 정수의 평소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사들이 있긴 했다. 그 장면 외에도 렌트카 사장과 어떤 식으로 대화하는지, 주유소 어르신에게 대하는 태도를 통해 정수의 긍정적인 모습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본다.
-오달수와는 ‘암살’ 이후 두 번째 호흡이다.
‘암살’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었는데 ‘터널’에서는 주로 전화로 소통했지. 후반부에 정수가 대경에게 귓속말로 한마디 하잖아. 실제론 달수 형 웃기려고 다른 대사를 말했다. ‘내가 조선의 국모다’,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했는데 형이 안 웃더라고.(좌중폭소)
-먹방 얘길 안 할 수 없다. 이번엔 개사료까지 먹었다.
개사료는 진짜 뻑뻑하더라. 간이나 조미료가 하나도 첨가가 안 돼 있더라. 밀가루 뭉쳐놓은 맛이다. 다이어트용 칼로리 바란스, 그게 개사료보다 한 10배 정도 더 달다고 보면 된다.
-출연작마다 먹방이 화제다. ‘하정우=먹방’이라는 인식이 배우로서 고민을 안긴 순간도 있었을 텐데.
처음엔 나도 걱정을 많이 했지. 진지하고 심각한 영환데 내 먹방 장면이 유머 게시판에 돌아다니니까. 어떤 관객들에겐 내 먹방이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잖아. ‘더 테러 라이브’ 때는 심지어 물 마시는 것까지 주목받으니까 이대로 괜찮나 싶었다. ‘아가씨’ 때 박찬욱 감독님께서 복숭아를 먹을 건데 괜찮냐고 물어보셨다. 작품에 필요 없는, 작품을 흐리는 먹방이라면 나역시 고민되지만 ‘아가씨’ 복숭아 먹방 같은 경우는 영화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정말 잘 먹긴 한다.(웃음) 따로 연구하는 지점이 있나
연구하진 않는데 얼마 전 내 먹방의 차이를 알았다. 보통 오케이 컷소리가 나면 먹던 걸 뱉거든? 난 진짜 먹는다. 아예 처음부터 뱉을 생각하고 먹는 연기와, ‘진짜로 먹어야지’라고 먹는 것은 그 기운부터 다르다고 본다.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 때는 미술팀에 식은 건 절대 안 먹을 거니까 뜨거워 김이 나는 양장피와 탕수육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 ‘황해’ 때도 미술팀이 촬영장 옆에서 계속 감자를 쪘지. 연기가 아니다. 뜨거워서 호로록 먹었던 거다.
-지금 찍고 있는 ‘신과 함께'(김용화 감독)에도 먹방이 나오나
육개장이 나온다. 아이고, 나참 이것도 웃겨가지고.(웃음) 장례식장에서 육개장 먹는 장면이 있는데 연출부가 나한테 전화를 해서는 ‘장례식장 반찬을 뭐로 할까요’라고 묻더라.(좌중폭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냔 말이지. 으하하. 그래도 난 또 대답해줬다. ‘무말랭이와 편육을 준비해주세요’라고. 하하.
-감독들이 이젠 하정우를 캐스팅할 때부터 먹방을 신경쓰는 것 같다. ‘터널’ 역시 마찬가지고
나홍진, 윤종빈, 나랑 작업했던 모든 감독이 다 신경 썼다. ‘황해’ 때는 민박집 장면이 있는데 나홍진 감독이 어떤 음식을 먹을지 미리 말 안 해줬다. ‘안에 들어가면 무가 있을 거야’라고만 해줬는데 들어갔더니 총각김치 한 통이 있는 거야. 푸하하. 먹으면서도 웃겨가지고 정말. ‘군도:민란의 시대’ 때는 닭백숙, 돼지고기 수육, 대파가 있었는데 나는 대파를 골랐지.
-김성훈 감독과 유독 각별한 이유가 뭔가
인간적 매력에 끌린 것 같다. 김성훈 감독은 데뷔작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이후 ‘끝까지 간다’까지 7년의 공백기가 있었다. 김 감독이 그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듣게 됐는데, 존경심마저 들더라.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끝까지 간다’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했거든. 허투루 되는 건 아니더라. 자연스럽게 ‘터널’의 흥행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더라. 배우가 연기를 잘하고, 캐릭터에 성실히 임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 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김성훈 감독의 첫 촬영 때와 마지막 촬영 때 얼굴이 생각나나
첫 촬영은 내 장면이 아니라서 문자를 보냈다. ‘오늘 비가 와서 촬영이 취소되고 스태프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기 바라요’라고 시작하는, 크랭크인날 벌어질 수 있는 사건사고를 쭉 나열해 보냈다. 감독을 해봐서 아는 건데, 크랭크인날 제일 공포스럽거든.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다 날 무시하는 것 같거든. 농담조의 문자로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다. 촬영 마지막 전날엔 감독님과 전화통화하는데 ‘터널’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라. 감독님이 촬영이 일찍 끝나 아쉽다며 촌스러운듯 수줍게 얘기하는데 진심이 전해졌다. 영화라는 작업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김수정 기자 swandive@tvreport.co.kr 사진=문수지 기자 suji@tv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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