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STREET]
연둣빛 새 잎이 나뭇가지를 가득히 채우고 공중에 버드나무 꽃가루가 눈처럼 날아다니면 봄이 무르익었다는 신호다. 한낮에는 따뜻하다 못해 뜨뜻해지고 바람에서 은은하게 더운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초여름이 바로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꽃이 팡팡 터지듯 피어난다. 이렇게 짙은 봄에 어울리는 클래식곡을 모아봤다. 선정 기준은 당연히 주관적이다.
봄에 어울리는 클래식 추천 1편 보러가기 (비발디 사계 없음)
‘드뷔시 – 목신의 오후 전주곡’
사실 어릴 적에는 이 곡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싫어하는 편이었다. 중독성 만점 후크송의 나라 K국민답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를 앞세운 곡들을 선호했기 때문.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이런 취향과는 정반대로 흐물흐물하고 녹진녹진하며 흐느적거리는 느낌이었다. 플룻과 오보에로 은근~하게 시작하는 도입부는 어쩐지 수상쩍고 음흉한 느낌마저 풍긴다.
알고 보니 그럴 만 했다. ‘목신의 오후’는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가 지은 동명의 시(1876)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1894)한 곡으로, 1912년 무용가 니진스키가 춤을 붙여 발레로 만들었다(1912). 여기 등장하는 목신(牧神)이란 허리 위는 사람이고 허리 아래로는 네 발 달린 짐승인 상상 속의 괴물 ‘판(faune)’ 이다(서양 동화나 판타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그 녀석 맞다).
목신은 후텁지근한 여름날 낮잠을 자다가 아름답고 관능적인 요정(님프)들을 떠올린다. 목신은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진 환상적 세계에서 요정들을 좇지만 결국 관능적인 아름다움은 덧없이 사라지고 허상만이 남는다는 줄거리다. 어린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그리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다. 흐물흐물하고, 녹진녹진하며, 조금은 불건전하다. 초여름에 발을 걸친 이 늦봄에 잘 어울린다.
‘차이코프스키 – 호두까기 인형 중 ‘꽃의 왈츠’’
‘으른’의 매력이 감도는 ‘목신의 오후’가 어린 시절 불호곡이었다면 ‘꽃의 왈츠’는 호호(好好)곡이었다. 우아하고 밝은 분위기에다 귀에 착착 감기는 명쾌 상쾌한 멜로디까지. 사방에 꽃이 가득한 언덕에서 공주와 왕자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빙글빙글 춤추는 모습이 저절로 상상된다.
호두까기 인형의 줄거리 자체도 참으로 건전하고 동화적이다. 할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행복하게 잠든 소녀 클라라가 꿈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도와 생쥐들을 쓰러뜨리고 과자 나라에 초대받아 춤추며 즐겁게 논다는 내용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족 발레로 인기있는 이유가 있다. 차이코프스키 스타일에서 웅장함과 애수를 쏙 빼고 드라마틱한 화려함만 남겨놓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근심걱정은 뒤로 미뤄두고 행복만 가득한 꽃의 나라로 떠나고 싶을 때 제격인 곡이다.
‘바흐 – 하프시코드 협주곡 5번 f단조 (BWV 1056) 2악장’
봄의 관능미와 화려함을 느꼈으니 이번에는 우아함을 찾아보자. 바흐 하프시코드 협주곡 5번(BWV 1056) 2악장을 추천한다. 똥땅똥땅 청명한 하프시코드 소리로 시작해 현악기들이 조금씩 합류하며 빚어내는 화음은 풍성하면서도 절도 있다.
바흐 하프시코드 협주곡 5번은 총3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Allegro Moderato, 조금 빠르게) / 2악장 라르고(Largo, 느리고 장중하게) / 3악장 프레스토(Presto, 매우 빠르게) 순이다. 클래식 곡들이 으레 그렇듯 악장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5번 중에서는 특히 2악장이 달달하고 여유로운 늦봄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중세나 근대 배경의 로맨스 영화에서 흘러나오면 안성맞춤일 듯.
‘모차르트 –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2악장’
세상에는 귀찮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선크림 바르기, 자기 전 양치하기, ‘봄에 어울리는 클래식 추천’ 목록에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2악장’ 추가하기. 사실 앞에 3곡 추천하고 나니 귀찮아져서 그만 적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 곡을 추천하지 않으면 글이 완성되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보드랍고 순수하며 ‘봄과 어울린다’는 말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곡이다. 플루트와 하프의 조화는 청순, 청초, 청신하다는 표현이 딱이다.
재미있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쓴 천재 작곡머신, 아니 작곡가 모차르트는 플루트를 안 좋아했다고 한다. 악기 자체가 싫었다기보다는 당대 플루트 연주자들의 수준이 모차르트의 성에 차지 않아서였을 거라고.이 협주곡은 그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던 귀느 공작과 공작의 딸이 함께 연주할 수 있도록 밝고 온화한 분위기로 만든 작품이다. 공작이 대접을 소홀히 하고 작곡 사례비를 제 때 주지 않는 등 트러블도 있었지만(참고 – 고클래식 ‘베이식 클래식’ 김유천 칼럼) 모차르트는 역시 모차르트였다.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곡은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모차르트가 투덜대면서도 어쨌든 성실하게 살았던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귀호강 할 수 있게 됐다.
에디터 LEE celsetta@donga.com
저작권자 ⓒ 29STREET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