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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의 인복을 확인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씨네:리포트]

강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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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 기사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TV리포트=강지호 기자] 말간 얼굴에 쓰여진 역사가 쓰리다. 짧은 글로 남겨진 역사와 죽음에, 상상력과 의미를 더해 탄생한 추모와도 같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장항준 감독·㈜쇼박스)’다.

4일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 엄흥도와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 이홍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역사 속 2줄 남짓한 글로 남겨진 엄흥도와 비운의 왕으로 기억되는 단종의 삶은 이 작품을 통해 새롭게 정의됐다.

넷플릭스 ‘약한영웅’을 통해 본격적인 대세 배우로 떠오른 박지훈과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대표 배우로 손꼽히는 유해진을 필두로 한 탄탄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왕과 사는 남자’는 장항준 감독의 지휘하에 탄생해 극장가 최고 기대작으로 떠올랐다.

▲ 말간 얼굴 위 새롭게 그려진 단종의 초상…청령포의 온기와 사람 냄새

많은 이의 울부짖음과 함께 영화의 막이 오르면 관객은 박지훈의 말간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박지훈은 눈빛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홍위의 모습으로 스크린을 찾은 박지훈은 영화가 설명해 주지 않는 모든 서사를 눈빛 하나에 전부 담아낸다. 설령 비운의 운명을 가진 단종의 삶을 알지 못하는 이가 있더라도 순식간에 극에 빠져들게 하는 놀라운 흡입력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어린 왕은 그렇게 먼 길을 떠난다. 많은 대사 없이도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박지훈의 눈빛은 이홍위가 탄 작은 가마와 함께 청령포에서 그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로 옮겨진다.

박지훈을 통해 전달된 역사의 무거움이 관객에게 닿을 때쯤, 익살스러운 얼굴을 한 유해진이 가벼운 유쾌함을 들고 관객을 찾는다. 화살에 침을 바르며 노련한 모습으로 등장한 유해진의 엄흥도는 순식간에 극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엄흥도의 등장과 함께 전래동화처럼 이야기를 이어가는 ‘왕과 사는 남자’는 마치 다리 다친 제비를 치료해 주고 금은보화를 기대했던 ‘흥부와 놀부’처럼 경쾌한 장단을 유지한다. 마음을 다치고 시들어가던 이홍위는 마을 사람들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다시 생기를 띄기 시작한다.

하지만 비극적인 역사는 이홍위에게 전래동화 같은 결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화 속 제비처럼 청령포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을 이홍위는 한명회라는 권력 앞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무력한 사랑을 깨닫는다.

그리고 여기서 ‘왕과 사는 남자’가 가진 의미가 빛을 본다. 더 이상 나약하지만은 않은 이홍위는 무력감에 굴복하는 대신 ‘범의 눈’을 하고 맞서기를 택한다. 장항준이 쓰고 박지훈이 그려낸 단종은 ‘진짜 왕의 모습’을 하고 있다.

▲ 장항준 감독이 정의를 추모하는 방법…기록의 공백 속 왕과 살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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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의 모습일지언정, 얼마나 말간 얼굴인가.

유해진이 그려낸 엄흥도의 시선 끝에서 이홍위는 또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인다. 왕이기에 앞서 아직 어렸던 한 소년의 모습이 엄흥도의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왕이기 전에 소년이었던 이홍위의 모습을, 관객은 엄흥도의 마음으로,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함께하게 된다. 

짧은 생 속에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짊어져 온 이홍위는 엄흥도를 만나고, 청령포 사람들을 만났기에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를 택한다. 그리고 그가 나아간 길의 끝에는 동화 같은 결말 대신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비극이 자신을 기다릴지언정 그럼에도 비굴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홍위의 곁에서 엄흥도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충신의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진짜’ 왕의 곁을 지킨다. 

앞선 간담회 당시 장항준 감독은 “‘왕과 사는 남자’는 ‘실현되지 못한 정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룬다고 생각한다”며 “‘성공한 역모는 박수받아야 하는가’,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야 하는가’, ‘단종의 죽음을 끝까지 지킨 충신 엄흥도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영화에 담은 마음을 전한 바 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스크린이라는 여백 위 새로운 단종의 초상으로 완성됐다.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 속 단종의 삶에서 시작된 영화다. 그렇기에 역사의 흐름도, 결말도 바뀌지 않는다. 대신 장항준 감독은 기록의 행간 사이 여백에 사람 냄새와 정의에 대한 추모를 담았다. 그렇게 탄생한 ‘왕과 사는 남자’는 관객에게 새로운 얼굴의 단종을 남긴다.  

박지훈의 눈빛은 영화가 막을 내린 후에도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유해진의 진가도 더할 나위 없다. 웃음을 안겨주던 유해진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순간, 관객은 그가 어떤 배우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살아 숨 쉬는 연기다.

묵직한 존재감으로 극의 척추가 되는 유지태와 중심을 잡는 전미도, 사람 냄새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청령포 사람들과 특별출연임이 믿기지 않는 열연을 펼친 안재홍, 이준혁, 정진운, 박지환까지. ‘왕과 사는 남자’는 어쩌면 장항준 감독의 인복을 확인하는 영화 같기도 하다. 

아쉬웠던 초반부 CG마저도 유쾌한 포인트로 넘겨 버리고 싶게 하는,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지금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2월 4일 개봉. 러닝타임 117분. 12세 이상 관람가.

마지막 한마디. 박지훈의 새 얼굴이 어서 보고싶다

강지호 기자 khj2@tvreport.co.kr / 사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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