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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간 모든 곳의 양자경 [31th BIFF]

강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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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포트=강지호 기자] ‘모든 시간 모든 곳의 양자경’,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양자경의 영화 세계를 조망하기 위해 마련한 특별전의 이름이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는 배우, 누구도 쉽게 대신할 수 없는 배우, 단연코 아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꼽을 수 있는 양자경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도 드물다.

칼끝을 따라 홍콩을 누비던 액션 스타는 어느새 본드걸이 됐고, 무협의 세계를 건너 할리우드로 향했다. 멀티버스에서는 수많은 자신으로 흩어졌다가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움직여 온 양자경에게 ‘대표적인 얼굴’ 하나를 고르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어쩌면 양자경의 필모그래피는 한 배우가 쉼 없이 이어온 긴 여행에 가깝다. 익숙해질 만하면 다른 장르로 향했고, 하나의 얼굴이 각인될 때쯤 또 다른 인물이 됐다. 60대에 접어든 지금도 마찬가지다. 도착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출발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이러한 양자경의 시간을 네 편의 영화로 펼쳐놓았다. 양자경이 직접 고른 ‘검우강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산디와라’와 신작 ‘우리 할머니는 큐브왕’이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에 놓인 네 작품을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 모든 시간, 모든 곳을 지나온 배우 양자경의 어제와 오늘이 보인다.

▲ 양자경의 무협 속으로…’검우강호’

수차오핀과 오우삼 감독이 공동 연출한 ‘검우강호'(2010)는 양자경의 출발점인 액션과 그가 쌓아온 연기의 깊이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양자경이 연기한 증정은 한때 살인청부조직 흑석의 최고 암살자였지만 과거를 지우고 평범한 삶을 꿈꾸는 인물이다. 얼굴까지 바꾼 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던 그는 배달부 아생(정우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과거의 그림자가 다시 그를 찾아온다.

발레리나 출신인 양자경은 직접 고난도 액션을 소화하며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통과했다. ‘예스마담: 황가사저’를 시작으로 ‘폴리스 스토리 3: 초급경찰’, ‘영춘권’ 등을 거쳐 ‘007 네버 다이’, ‘와호장룡’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검우강호’에서도 칼을 쥔 양자경의 몸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액션만 남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한 여성의 마음이 무협의 틀 안에 함께 자리한다. 액션 스타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배우가 자신의 장기를 놓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다른 얼굴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 모든 순간의 양자경…’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12년 뒤 양자경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꺼내 들었다.

다니엘 콴과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에서 양자경은 세탁소를 운영하며 세금 문제와 가족 갈등에 시달리는 에블린을 연기했다. 어느 날 수많은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블린은 각기 다른 우주의 자신이 가진 능력을 끌어와 세계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평범한 중년 여성부터 액션 스타, 영화배우까지 수많은 에블린이 등장한다. 양자경이 수십 년 동안 구축한 이미지가 한 작품 안에서 충돌하고 뒤섞인다. 젊은 시절부터 몸에 익힌 액션도, 세계적인 스타가 된 자신의 모습도 모두 에블린의 가능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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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양자경은 이 작품으로 아시아계 배우 최초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홍콩 액션영화에서 출발한 배우가 할리우드의 한계를 넘어 아카데미 역사의 ‘최초’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양자경의 완성은 아니었다. 제목처럼 모든 시간과 모든 곳을 통과한 뒤에도 그에게는 아직 해보지 않은 연기가 남아 있었다.

▲ 다섯 명의 양자경을 만난다, 1인 5역…’산디와라’

이번 특별전에서 가장 짧은 작품은 션 베이커 감독의 ‘산디와라'(2026)다. 러닝타임은 단 11분. 대신 그 안에 양자경 다섯 명이 산다.

말레이시아 페낭의 야시장을 무대로 양자경은 푸드 유튜버부터 노련한 식당 셰프, 무대에 오른 가수, 냉정한 평론가, 활기 넘치는 웨이트리스까지 서로 다른 다섯 인물을 연기한다.

말레이어로 ‘연극’, ‘놀이’ 등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영화는 양자경이라는 배우를 마음껏 가지고 논다. 멀티버스를 넘나들며 수많은 자신을 보여줬던 배우가 이번에는 11분 안에서 전혀 다른 다섯 사람으로 변신한다.

올해 64세. 양자경은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지 않지만 여전히 변신 자체를 즐긴다. 긴 서사나 거대한 액션이 없어도 배우 한 사람이 얼마나 다른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짧고 경쾌하게 펼쳐낸다.

▲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가능성…’우리 할머니는 큐브왕’

바이 슈에 감독의 ‘우리 할머니는 큐브왕'(2026)에서 양자경은 사기 혐의로 집을 잃고 양로원에서 생활하게 된 자오를 연기한다. 자오는 한때 매직큐브 세계 챔피언이었던 청년 우유웨이를 만나 큐브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다.

매직큐브 하나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려 43.25경. 쉽게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숫자는 어쩐지 양자경이라는 배우를 떠올리게 한다. 40여 년 동안 수없이 다른 얼굴을 보여줬지만 여전히 새로운 얼굴을 꺼내고, 수많은 도전을 거친 뒤에도 또 다른 도전을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양자경은 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매일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고 말했다. ‘우리 할머니는 큐브왕’ 역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삶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는 나이 든 사람에게도 회복탄력성이 있고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올해 64세. 이미 액션 스타로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누렸고 할리우드로 건너가 세계적인 배우가 됐다.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품에 안았다. 그럼에도 양자경의 다음을 쉽게 예상하기는 어렵다. 이미 보여준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여전히 보여줄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경이 직접 고른 ‘검우강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산디와라’와 신작 ‘우리 할머니는 큐브왕’은 더욱 흥미롭다. 액션 스타였던 과거부터 수많은 가능성을 펼쳐 보인 순간, 여전히 변신을 즐기는 현재까지. 네 편의 영화에는 양자경이 지나온 서로 다른 시간이 담겨 있다.

그러나 ‘모든 시간 모든 곳의 양자경’이 보여주는 것은 지나온 시간만이 아니다. 43.25경이라는 숫자처럼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앞으로 양자경이 보여줄 또 다른 얼굴과 도전이다. 이미 모든 시간과 모든 곳을 누빈 것 같은 배우가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지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40년 넘게 양자경을 계속 바라보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강지호 기자 /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TV리포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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