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양원모 기자] 헤이즈가 비극적 역사에 오열했다.
7일 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헤이즈, 조우진, 조달환이 이야기 친구로 출연해 한국전쟁 최대 민간인 학살터이자 7000명에 이르는 피해자의 영혼이 깃든 것으로 추정되는 ‘골령골’의 비밀을 들었다.
1993년 심규상 기자는 대전 동남쪽 한적한 산골짜기를 찾았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엄청난 양의 사람 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 더 이해되지 않았던 건 마을 주민들의 반응. 주민들은 골짜기의 ‘골’자만 꺼내도 날 선 반응을 보였고, 수차례 설득 끝에 한 어르신 입에서 나온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예전부터 그 골짜기에 사람 뼈가 많이 나왔다”는 것.
골짜기 이름은 ‘골령골’. 뼈 ‘골(骨)’에 산봉우리 ‘령(嶺)’을 써 “뼈가 산처럼 쌓여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었다. 골령골의 비극은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이 곳은 국군과 인민군의 잔인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현장이었던 것.
해방 직후 ‘미군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취재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백락용 씨는 어느날 ‘국민보도연맹’이란 단체에서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고향인 서천의 연맹 지부장을 맡으면 전과를 삭제해주겠다는 내용. 락용 씨 입장에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락용 씨는 한국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 27일 대전형무소로 끌려갔다. 이승만 정부가 북한의 남침 이후 “인민군이 내려오면 인민군 편에 설지 모른다”며 보도연맹 회원들을 잡아들였기 때문. 정부는 인민군의 손에 대전이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대전형무소에 “좌익 극렬분자들을 처형하라”는 전문을 보내고, 그렇게 5000여명이 골령골에서 목숨을 잃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수세에 몰리자 북한 정부는 앞선 보도연맹 학살 가담자, 우익 인사 약 1600명을 잡아들여 골령골에서 처형했다. 불과 세 달 만에 국군, 인민군에게 7000명의 사람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헤이즈는 골령골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할아버지의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 헤이즈는 “저때 내가 살고 있었다면, 내 가족이 살고 있었다면 우리가 그 희생자였을 것”이라며 “너무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학살지에서 발굴된 유해 일부가 플라스틱 통에 임시 안치돼 있다는 사실을 안 뒤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것 아니냐”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양원모 기자 ywm@tvreport.co.kr /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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