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정교한 우주에 귀를 기울이면, 단편 소설집 같은 ‘낮과 밤은 서로에게’ [씨네: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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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포트=강지호 기자] 작고 정교한 세계, 수많은 디자인, 서로 다른 우주에서 각자의 태엽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 어떤 소리가 날까. 한 권의 단편 소설집을 닮은 영화 ‘낮과 밤은 서로에게'(김종관 감독)다.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으로 처음 공개된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여름에서 가을 사이, 하나의 카페에서 네 쌍의 남녀가 나누는 유쾌하고 담백한 대화를 담은 작품이다.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조제’ 등을 통해 자신만의 형식과 감성을 구축해 온 김종관 감독은 이번에도 대화에 집중한다. 불특정 다수가 머물다 떠나는 카페라는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인물의 서사와 분위기를 경쾌한 호흡으로 그려낸다.
스크린에 막이 오르면 어제 방문한 카페 옆자리에서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이 극장을 채운다. 외국에서 겪은 일화부터 학생들의 웃음소리, 대출 이야기까지. 별것 아닌 일상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낮과 밤은 서로에게’의 문이 열린다.

▲ ‘한여름 밤의 꿈’…스위스에 가도 시계 고치지 말기
낮의 카페에서 시계 속을 들여다보며 작고 정교한 세계에 관해 말하는 현오(주종혁)와 밤의 카페에서 우연히 겪은 일화를 조곤조곤 털어놓는 유진(김민하)은 다른 시간에 존재하면서도 묘하게 닮아 있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두 사람의 모습은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 놓인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리킨다. 유진의 신발을 한 짝씩 전부 가져간 할머니, 맨발로 운동화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유진, 한 짝밖에 없는 신발의 꿈에서 깨어 창밖으로 그런 유진을 바라보는 현오까지.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의 세계가 잠시 겹친다.
스위스로 향하는 유진과 스위스에 가기를 꿈꾸는 현오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스위스에 가서도 시계를 고치지 않아야겠다며 아직 만나본 적 없는 현오와의 인연을 농담처럼 꺼내는 유진의 말에는 묘한 여운이 남는다.

▲ ‘아직 나인 사람들’…잊지마, 잊으면 끝이야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상미(한선화)는 영민(장률) 앞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무언가만큼은 확신하는 얼굴로. “뭐든 절대 한순간도 믿지 마”라고 말하며 영민의 혼을 빼놓는 상미는 엉뚱하고 이상하다.
상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SF 단편을 읽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의 말에 하나씩 답하는 영민의 모습은 처음 ‘아직 나인 사람들’을 접하는 관객의 반응과도 닮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좀처럼 맞물리지 않는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상미가 던진 말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는다.
“우리 같은 사람이 뭔데?”
“아직 나인 사람들”

▲ ‘이.순.불(이토록 순수한 불륜)’…숨겨진 진짜 구멍 같은 것
도파민으로 절여진 듯한 웹소설 작가 혜진(심은경)의 모습으로 나타난 심은경을 보면 시작부터 웃음이 터져 나온다. 당돌한 모습으로 “허!”하고 웃는 인기 작가 혜진의 앞에 그의 작품 ‘이.순.불(이토록 순수한 불륜)’을 드라마화 하고 싶다는 영화감독 동남(이희준)이 나타난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능글맞은 말투로 말을 쏟아내는 동남. 처음에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던 혜진도 어느새 황당하다는 듯 웃고 만다.
무엇보다 심은경과 이희준의 호흡이 좋다. 동남의 능글맞음과 혜진의 당돌함이 부딪칠 때마다 웃음이 생긴다. 앞선 두 이야기와 또 다른 리듬으로 흘러가는 ‘이.순.불’은 ‘낮과 밤은 서로에게’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웃음을 담당하는 에피소드다.

▲ ‘가을 이야기’…헤어져 보는 게 처음이라 엄두가 안나더라
뭐든 처음은 어렵다. 첫사랑도 어렵고, 첫 이별은 더 어렵다.
누구보다 친밀했던 사람과 가장 어색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순간이 이별이다. 서로를 응원하는 말을 건네다 잠깐의 정적 끝에 결심을 전하는 종수(김동휘)는 모든 것이 힘겨워 보인다.
종수는 아이돌을 준비하는 연인 나경(전소영)이 먼저 꺼낸 이별을 결국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것과 마음을 정리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나 너를 참 많이 좋아한 것 같아. 우리 엄마 아빠보다 더, 어쩌면 나보다도 더.”
종수의 말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첫 이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은 때로 스스로 내린 선택이라기보다 받아들여야 하는 결심에 가깝다.
특히 김동휘의 연기가 아프다. 붉어진 눈과 쉽게 이어지지 않는 말 사이에 ‘처음’의 감정을 담아낸다.
네 개의 이야기는 인물도, 분위기도, 장르의 결도 다르다. 하지만 ‘낮과 밤은 서로에게’라는 제목 아래 놓이면 조금씩 서로를 비추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대화와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서로 만난 적 없는 사람의 삶도 어딘가에서는 겹친다. 같은 공간을 지나고, 비슷한 마음을 품고,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전혀 다른 네 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보면 결국 꽤 닮아 있는 우리의 삶이 보인다. 관객과 대화하듯 흐르는 영화 ‘낮과 밤은 서로에게’다.
강지호 기자 / 사진= 영화 ‘낮과 밤은 서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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