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수정 기자] 한예리만큼 다채로운 빛깔을 지닌 이도 드물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장르와 캐릭터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그렇다. 어떤 옷을 입든 늘 유려하게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그는 영화 ‘사냥'(이우철 감독, 빅스톤픽처스 제작)에서도 제 몫을 똑소리 나게 해내며 극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사냥’은 우연히 발견된 금을 독차지하기 위해 오르지 말아야 할 산에 오른 엽사들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린 사냥꾼의 목숨을 건 16시간을 그린 영화다. 한예리는 막장 붕괴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소녀 양순을 연기했다. 또래보다 지능 발달 속도는 조금 모자란 아이인 양순은 우연한 계기에 기성(안성기)과 함께 엽사 무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자칫 소모적으로 머물 수 있었던 캐릭터지만 한예리라는 빛이 덧입혀지자 오히려 영화에 유머와 생동감을 불어넣는 히든카드가 됐다. 지능이 낮다는 설정을 기능적으로 연기하는 대신 맑고 건강한 아이로 그리고 싶었다는 한예리의 전략이 제대로 통한 셈이다. 시나리오에 적힌 지문 그 사이 행간을 정확하게 파헤치는 눈을 지닌 한예리. 그가 감독들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 다음은 한예리와 일문일답
-자칫 잘못하면 과잉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나 역시 극의 흐름을 깨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으로 접근했다. 양순이의 모자란 부분을 더 부각해서 보여줄 수도 있었겠지만, 건강하고 맑고 순수한 아이로 그려지길 바랐다.
-연변 사투리(‘해무’), 북한 사투리(‘코리아’, ‘스파이’)에 이어 이번엔 강원도 사투리다.
강원도 사투리는 말의 높낮이가 있어서 또 다른 언어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고향이 충북 제천인데 강원도 영월이라 가깝거든. 강원도 사투리가 익숙하긴 했다. 어쩌다 보니 사투리 연기를 많이 하게 됐는데 아직 경상도 사투리는 안 해봤다.(웃음)
-산속 로케이션이다 보니 고충이 많았을 것 같다.
‘해무’만큼 어렵진 않겠지란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화장실이 가장 불편했다. 한 번은 화장실 가려고 차 타고 40분씩 이동한 적도 있다.
-소속사 사람엔터테인먼트 선배인 조진웅과 주연으로 호흡을 맞춘 건 처음이다.
늘 같이 연기해보고 싶었다. 왠지 선배님은 연기도 ‘슥, 슥’ 편하게 하시는 것 같았거든. 상대 배우로 좀 더 호흡을 맞추면 그 노하우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안성기와의 호흡은 어땠나
정말 좋았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냥’에 출연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안성기 선배님이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나. 선배님은 스태프, 감독이 헤매고 있을 때 부러 이런저런 얘길 하지 않고, 그들이 각자 본인들만의 방법으로 잘 찾아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주신다. 정말 대단하고 멋있다.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늘 웃으신다. 나 역시 속에서 아주 작은 불만이 싹틀 때가 있거든. 마음이 얕아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선배님의 인내심을 보며 반성을 많이 했다. 나이를 책임진다는 말이 어울리시는 분이다.
-안성기는 정말 현장에서 화를 안 내나?
딱 한 번 봤다. 선배님께서 몸이 아프신 날이었는데, 그걸 스태프에게 전했다고 매니저분에게 노여워하시더라. 아픈 건 내 일인데 그걸 왜 굳이 전하냐고. 캬, 선배님 같은 남잘 만나야 한다.(웃음)’
-‘사냥’을 통해 배우로서 어떤 평가를 받고 싶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는 것, 캐릭터 연기도 가능하다는 것. 데뷔 초반엔 소녀 같은 캐릭터들이 많이 들어왔거든. ‘해무’ 이후 들어오는 시나리오들은 조금 더 여성스러운 캐릭터들이 들어오더라. 그때 느낀 게 한 작품의 영향은 개봉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것, 한 영화로 얻을 수 있는 게 단순히 흥행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데뷔 이후 거의 4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최근 몇 년 들어 다작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
정말? 내가 그렇게나 많이 출연했나? 하하. 나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웃음) 딱히 계기가 있다기 보다, 예전보다 엉덩이가 살짝 가벼워진 건 사실이다. 예전엔 작품 하나에 들어가기 전 정말 무겁게 고민했거든. 최근엔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어떤 일 하나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고, 뭐 하나 잘못됐다고 해서 크게 고꾸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서인지, 조금은 가벼워질 필요가 있겠더라.
-무쌍커풀 인기 개척자다.(웃음)
하하. 감사한 일이다. 미의 기준이 달라진 것 같다. 특히 (김)고은 씨, (박)소담 씨, (천)우희 씨처럼 좋은 여배우들이 풍성하게 자리 잡고 있고, 나 역시 거기에 조금은 한몫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차기작 계획은?
일단 JTBC 주말드라마 ‘청춘시대’가 7월 22일 첫 방송이다. 영화 ‘최악의 여자’가 드라마 종영 전에 개봉할 것 같고, ‘춘몽’도 올해 개봉할 것 같다. 아직 내년 농사 지어놓은 게 없는데 작품이 연달아 개봉하니 조금 걱정이긴 하다.(웃음)
김수정 기자 swandive@tvreport.co.kr 사진=김재창 기자 freddie@tv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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