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은정 기자] “저에게 연극은 강을 거꾸로 오르는 일이에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 같은 거죠. 아직 고향에 도착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저에겐 연극 무대입니다.”
배우 장지후가 말하는 연극의 매력이다. 연기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연극 무대 위 장지후는 눈을 뗄 수 없는 존재감을 발산한다.
장지후는 지난 9월 14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개막한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에 출연 중이다. ‘카포네 트릴로지’는 렉싱턴 호텔 661호라는 제한된 장소에서 약 10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세 가지 사건 ‘로키’ ‘루시퍼’ ‘빈디치’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각 에피소드는 코미디, 서스펜스, 하드보일드 장르로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으며 배우들의 변신 또한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2015년 국내 초연, 2016년 재연, 2018년 삼연까지 매 시즌 매진을 기록했던 ‘카포네 트릴로지’는 3년 만에 뉴프로덕션과 새로운 창작진의 손에서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 됐다. 블랙박스 형식의 소극장에서 프로시니엄 형태의 중극장으로 규모를 키웠고, 원작에 충실한 각색으로 전 시즌과 차별화를 꾀했다.
장지후가 맡은 역할은 ‘영맨’으로 각 에피소드에서 복수심으로 가득한 전직 경찰 빈디치(‘빈디치’), 가족을 사랑하는 경찰 마이클(‘루시퍼’), 익살스러운 경찰 클레이(로키) 등으로 분한다. 다채로운 매력으로 무대를 장악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Q. 약 한 달간 무대에 선 소감은?
▶ 참 정신없고 힘든 시간이었다. 적응하느라 많이 애썼다. 각각 다른 장르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되는 공연은 처음이라 여러 가지로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공연할 때 땀을 거의 흘리지 않는 편인데 ‘로키’만 끝나면 셔츠가 젖어 있더라. 심지어 ‘로키’는 3가지 에피소드 중 첫 번째인데 말이다. 정말 잘해보고 싶고 좋은 작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배우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내고 있다.
Q. ‘에브리바디 원츠 힘 데드'(2019) 이후 ‘환상동화'(2020), ‘안녕, 여름'(2021)까지 1년에 최소 한 편의 연극에 출연 중이다. 연극을 선택하게 되는 매력은 무엇인가?
▶ 저에게 연극은 강을 거꾸로 오르는 일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 같은 거다. 아직 고향에 도착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저에게는 연극 무대다. 우리는 도시에 살면서도 가끔 풀밭에 눕는 상상을 하잖나. 그런 느낌이다.
배우로서 해야 할 것들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하나씩 제외하다 보면 결국 연기가 남는다. 마지막까지 배우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게 연기일 거다. 아주 힘든 일인 걸 잘 알지만 자꾸 도전하고 싶어지고 더 나아가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저에게 매력으로 다가와서 계속 연극 무대에 도전하는 것 같다.
Q. ‘카포네 트릴로지’는 세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배우로서 느끼는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은 무엇인가?
▶ 이 작품은 각각 장르가 다른 세 가지 에피소드가 시간에 따라 나열되어 있다. ‘나쁜 일은 항상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다’라는 주제를 렉싱턴 호텔 661호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세 가지의 각각 다른 이야기로 풀어내는 방식은 그 자체로 이미 차별화된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다. 에피소드 하나가 끝나면 인터미션 15분 동안 전혀 다른 작품을 준비하는 기분이 든다. 주제와 공간 말고는 모든 게 바뀐다. 시간이 제일 먼저 바뀌고 그 다음 분위기(장르)가 바뀐다. 그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 배치된 작은 소품들, 배우의 역할, 인물 관계, 의상까지 바뀐다. 전혀 다른 공연을 준비하는 기분이 드는 게 절대 이상한 게 아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다음 에피소드를 준비하는 15분 동안 최선을 다한다. 관객들이 이미 다음 공연을 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Q. 하루에 두 에피소드, 혹은 세 에피소드를 연속으로 공연하면서 길게는 3시간 반 이상 무대에 선다. 인터미션도 20분에서 15분으로 짧아졌는데, 이에 따른 힘든 점은 없는지?
▶ 시간이 길어서 힘든 건 전혀 없다. 보통 다른 작품은 주말에 2회를 할 때가 많은데 그것보다 이렇게 3시간 빈을 한 번 하고 끝내는 게 오히려 상쾌할 때도 있다. 주말 공연을 끝내고 집에 가려고 주차장에서 나오는데 그때까지도 해가 떠 있더라. 그런 게 묘하게 상쾌했다.
굳이 따져보자면 오히려 에피소드가 나누어져 있는 부분이 약간 힘들었다. 에피소드 하나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는데, 10분 뒤에 다음 에피소드 시작 5분 전을 알리는 예종이 울리면 또다시 긴장이 되기 때문이다. 세 에피소드를 모두 하는 날에는 이 긴장감을 반복해서 느끼다 보니 (에피소드가 3개니까 인터미션이 2번이다!) 은근히 체력소모가 크다. 긴장되니까 물을 계속 마시고 물 계속 마시면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는데 성격상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 근처를 떠나질 않아서… 지금 생각해보니 화장실 못 가는 게 제일 힘들다.(웃음)
Q. 앞서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연기하기 가장 까다로운 인물로 ‘로키’의 벨보이 벨을 꼽았다. 지금도 번을 연기하는 게 까다로운지, 더불어 장지후 만의 번을 찾았는지?
▶ 아직까지도 번이 연기하기 까다로운 것 같다. 번은 온전히 그 인물로 등장하는 시간이 제일 짧다. 다른 인물로 변하는 텀이 가장 짧아서 까다로운 캐릭터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매우 중요하다. 롤라에게 연인 니코가 호텔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고 바비&클레이가 나타날 수 있게 하는 샴페인을 배달한다든지, 롤라의 부모님이 롤라의 방으로 방문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이다. 벨보이 번이 없다면 다른 캐릭터들은 롤라의 방을 방문하는 당위성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연습실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문득 ‘번이 얼마나 외롭게 일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그 누구도 벨보이를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비에서 내 손을 떠난 짐가방은 자연스럽게 방안에 도착해 있는 거고, 세탁물이나 필요한 것들은 언제든 주문만 하면 나타나는 거지 누가 내 짐을 방으로 옮겼는지 내 심부름을 해줬는지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게 되게 외로울 것 같았다. 그래서 목소리에 늘 울음이 담겨 있다. 톡 치면 바로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상태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 특히 서비스업은 사람한테 치이고 그런 스트레스들이 늘 누적되어 있다. 렉싱턴 호텔이라는 정글에서 가장 약한 동물은 번이다. 위태롭지만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게 저의 번이다.
Q. 치열한 베개 싸움도 하고, 창문에서 추락하기도 한다. 의외로 격렬한 액션씬에 체력적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많을 것 같은데?
▶ 걱정이 많았다. 특히 닉과 마이클이 창문으로 떨어지는 장면이 그랬다. 격양된 두 남자가 싸우다가 결국 창문으로 떨어지게 되는 ‘사고’를 연출해내야 하면서 동시에 다치지 않아야 하는 일이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추락하는 일은 아무리 합을 맞춰도 생각지도 못한 사고가 생길 수 있다. 오히려 주먹질하는 장면은 두 발이 땅에 닿아 있어서 신체를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다. 연습실에서 합을 많이 맞췄고 상대 배우별로 타이밍도 계산이 되어있기 때문에 안전하지만, 창문으로 떨어지는 장면은 지금도 항상 예민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연기지만 거친 호흡으로 싸우다 보면 흥분을 하고 그렇게 되면 진짜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감 나는 액션 장면을 보여드리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안전을 위해 긴장의 끈을 절대 놓지 않을 테니 편안하게 관람하셔도 괜찮다.
Q. 영맨은 광대, 경찰, 부모님, 대머리 등 다양한 캐릭터로 분한다. 관객들이 장지후의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보면 좋을까?
▶ 특별히 어떤 부분을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이 공연을 같이 즐기고 장르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느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저는 배우가 캐릭터를 설정하면 그 캐릭터 안에 배우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건데 그게 참 신기하고 재미있더라. 같은 역할을 다른 배우가 연기하면 장면의 분위기나 뉘앙스가 다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이나 작은 습관을 찾아보는 게 은근히 재미있더라. 하지만 자꾸 그런걸 찾다 보면 극에 집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웃음)
Q. 연극 무대에서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일어난다. 기억에 남는 실수 에피소드가 있는지?
▶ 얼마 전 ‘루시퍼’에서 말린과 닉에게 보여줘야 할 가족사진을 안 가지고 나간 일이 있었다. 등장하기 전까지 무대 뒤에서 말이 잘 꼬이는 부분의 대사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등장하는 타이밍이 돼서 바로 무대로 나갔다. 사진 챙기는걸 깜빡했다. 등장해서 한참 장면이 이어졌고 말린이 ‘아이들 사진 좀 보여달라’고 해서 재킷 안쪽 주머니로 자연스레 손을 넣었는데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일이 벌어졌다. 거기에 없었던 게 사진인지 제 심장이었는지 모르겠더라.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해결하고 넘어가긴 했는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 제가 도대체 뭐라고 했는지 생각이 안 났다. “저기..는 다섯.. 아니 네 살.. 로비는 세 살” 그 뒤로는 무조건 사진부터 챙긴다. 죄송합니다.
Q.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 ‘나쁜 일은 항상 같은 곳에서 일어난다.’처럼 징크스 혹은 우연처럼 겪는 일이 있는지?
▶ ‘상쾌한 아침과 부재중 전화 80통’을 상상할 수 있나? 실제로 저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대학 시절 영화과에 존경하는 선배가 있었다. 선배가 졸업하고 처음으로 영화 촬영을 한다고 저를 섭외했다. 학교에서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선배와 함께 연기를 하게 된 거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연락이 없었고, 저는 학교 수업과 공연 연습을 하면서 잘 지냈다. 그날 아침을 맞이하기 전까는.
유난히 푹 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밖에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고 밤에 살짝 열어둔 자취방 창문으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게 적당했다. 온도, 습도 이불의 두께까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정말 최고의 날이다” 그리고 핸드폰을 봤는데 부재중 전화가 80통이 찍혀 있었다. 제 인생을 통틀어서 하루 동안 죄송하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해본 기억이 없다. 생각하니 지금도 손이 떨린다. 제가 연습실이나 공연장에 1~2시간 일찍 도착하는 버릇이 생긴 이유랍니다.
Q. 함께 공연하는 상대 배우와의 케미 자랑을 해본다면?
▶ 일단 올드맨부터, (이)건명이형은 ‘명건이형’이라고 이름의 앞뒤를 바꿔서 부를 정도로 사이가 좋다. 참 선하고 깨어있는 사람이다. 뭘해도 잘 받아줄 거라는 서로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함께 무대 위에 서 있으면 ‘친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꼭 천하무적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영빈형은 ‘세종 1446’, ‘마마돈크라이’에 이어 벌써 세 번째 만남이다. 형은 아주 품격있는 사람이다. 온화하고 젠틀하지만 묵직한 한방이 있다. 연기에도 그게 묻어난다. 개인적으로 형이 로키에서 다양한 연기 변신을 하는 게 저는 너무 재미있다. (박)은석이형은 이번 작품으로 만난 아주 보석 같은 사람이다. 진중하고 사려 깊다. 그게 형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고 작품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올드맨 중 나이가 가장 어려서 그런지 확실히 예리하고 세련된 선택을 한다. 무대 위에서 같이 연기하고 있으면 ‘참 좋은 배우와 호흡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적으로도 저랑 성격이 잘 맞아서 우린 단짝이 됐다.
홍륜희 누나는 아주 귀엽다. 우린 MBTI가 같아서 단번에 서로를 알아봤다. 아무리 대화가 길어져도 불편한 호흡이 하나도 없었다. 누나는 연습하는 동안 엄청난 집중력을 보인 굉장히 매력적인 배우였다. 모든 역할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정화 누나는 센스가 톡톡 튀는 배우다. 상대가 느끼는 미세한 호흡들을 기가 막히게 캐치해낸다. 굉장히 예리하게 연기를 한다. 준비된 걸 하는 느낌이 아니고 그 순간 상대 배우에게서 받은 호흡으로 즉석에서 자신의 호흡을 만들어낸다. 타고난 배우다. 박가은 배우는 ‘검은 사제들’, ‘안녕, 여름’에 이어 이번 작푸까지 연달아 세 작품을 같이하고 있는데 볼 때마다 성큼성큼 성장하더라. 가은이는 생각이 깊고 마음씨가 곱다. 그건 아주 중요하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경력이 많지 않다는 점 때문에 주변에서 걱정스런 눈빛을 많이 받았을거고 그게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그들의 눈빛을 바꿔버렸다.
올드맨 세 분 그리고 레이디 세 분과 같이 무대에 올라 연기하고 호흡하는 게 영광이다. 인간적으로 그들에 대한 존경이 충분히 넘치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의 케미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Q. 같은 역으로 열연 중인 송유택, 강승호 배우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면?
▶ 각자의 분석과 호흡으로 지금도 열심히 무대 위에서 땀 흘리고 있을 유택아 승호야. 연습실에서만큼 볼 수는 없지만 영맨으로서 얼마나 잘 해내고 있을지 믿어 의심치 않고 있고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너희들도 니코로 침대 밑에서 나올 때 숨차고 힘드니? 나는 클레이로 헐레벌떡 등장하고 나면 요즘 의자에 앉아서 샴페인을 마셔. 그렇게라도 잠깐 쉬어야겠거든. 너희들도 힘들면 그렇게 해봐. 그리고 얼마 전에 나 사진 안 가지고 나가서 심장이 많이 떨렸어. 너희들은 잊지 말고 챙겨나가라. 그리고 이제 가을이다. 안녕.
Q. .아직 ‘카포네 트릴로지’를 접하지 못한 예비 관객들에게 관람 독려 한 마디.
▶ 배우들이 땀 흘리며 노력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더욱 멋지고 탄탄해질 수 있도록 작품이 끝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테니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편 장지후는 오는 11월 2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 무대에 오르며, 차기작으로 뮤지컬 ‘더 데빌’ 출연을 확정했다.
김은정 기자 ekim@tvreport.co.kr / 사진=알앤디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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