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수정 기자] 1500대 1의 경쟁률, 거장 박찬욱의 신작, 칸 경쟁진출, 동성 베드신, 노출…. 김태리가 짊어진 숙제들이다. 이제 막 한 편의 영화를 찍은 신인이 겪기엔 만만찮은 무게지만 김태리는 담대하게 어려운 숙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
영화 ‘아가씨'(모호필름·용필름 제작)는 돈과 마음을 얻기 위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인물들을 그린 영화다. 박찬욱에 의해 창조된 이 탁월하게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세계 안에서 김태리는 하녀 숙희라는 옷을 입고 관객과 마주한다.
“천지 간에 아무도 없는”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의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사기꾼 백작(하정우)과 작당모의해 하녀로 접근한 숙희는 아가씨에게 조금씩 마음이 흔들린다. 아기를 품에 안은 첫 장면이 보여주듯, 숙희는 남다른 모성애의 소유자다. 고아인 자신이 느끼지 못한 어미의 정을, 역시나 고아인 히데코에게 쏟아낸다.
그래서 숙희는 순수함과 배짱, 따뜻함을 두루 갖춘 배우여야 했다. 늘 차분하게 상황을 대처하는 김태리의 성품은 숙희 역에 제격이었다. 아나운서를 꿈꿔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진학한 김태리는 학창시절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거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왔다. 현실의 바닥에서 길어올린 인생 경험은 또래에게선 쉬이 느껴지지 않는 남다른 생활력을 갖게 했다. 박찬욱 감독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정말 많이 했어요.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KFC에서도 하고, 모 신문사에서 간단한 사무 아르바이트도 하고, 카페 아르바이트도 정말 오랫동안 했고. 지금은 멀티플렉스로 바뀐 청담동 극장에서도 휴학하고 6개월 정도 일했어요. 분명 저라서 가능한 숙희의 얼굴이 있었을 거예요. 숙희처럼 손재주가 좋아서 뚝딱 뚝딱 뭐든 잘 만드는데, 마무리가 야무지질 못해 와르르 무너지는 타입이랄까요.(웃음)”
베드신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정작 김태리에게 힘든 장면은 따로 있었다. 너털웃음과 은골무 장면이 그것. 푼수처럼 너털웃음을 지어야 하는데, 안으로 삼키는 웃음이라 너무 힘들었단다. 숙희가 히데코의 뾰족한 치아를 갈아주는 은골무 장면에서는 담이 걸린 것처럼 벌벌 떨어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단다.
“왠지 모르게 너무 떨리는 거예요. 감독님께서도 ‘너 왜 그러니. 갑자기 엉망진창이 됐어’라고 놀라실 정도였죠. (김)민희 언니가 ‘그럴 때 있어. 심호흡 한 번 해’라고 달래줘서 다행히 마음을 추스르고 촬영할 수 있었죠.”
김태리는 박찬욱 감독의 존중과 배려, 애정을 듬뿍 받으며 연기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원격 조정 카메라로 베드신을 촬영한 것만 봐도 박찬욱 감독의 배우를 향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감독님은 매 장면, 매 컷에 대한 시선이 정확해요. 본인이 뭘 원하고 있는지 분명히 아시다 보니 배우는 감독을 믿고 연기할 수 있었죠. 전 뭐든 처음이었잖아요. 제 의견은 굳이 안 듣고 넘어갈 수 있는 데도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까지 제 의견에 귀 기울여 주셨어요. 아, 나도 이 영화의 일부분이구나라는 생각에 감사했죠.”
오디션 당시 김민희에게 뿍 빠져 있던 김태리는 운명처럼 ‘아가씨’에 캐스팅됐고,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레드카펫까지 밟게 됐다. 벌써 차기작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함께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부러 벌써 걱정하고 싶지 않다는 김태리다.
“저는 닥쳤을 때 고민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나마 ‘아가씨’ 이전엔 이 정도 고민도 안 했어요.(웃음) 제가 만에 하나 다음 작품에서 실망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면, 또 그다음 작품으로 다시 만회하면 되지 않을까요.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제가 이 뜨거운 관심 속에서 어떤 지점에 서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헷갈린다는 거예요. 휩쓸리고 싶지 않아요. 단단히 중심을 잡으려 부단히 애쓰고 있는 요즘이에요.”
김수정 기자 swandive@tvreport.co.kr 사진=문수지 기자 suji@tv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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