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수정 기자] 문정희는 시나리오의 장점은 더욱 돋보이게, 빈틈은 티 안 나게 채우는 배우다. 차분한 목소리와 넓은 진폭의 감정 연기는 어떤 캐릭터의 옷을 입든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문정희의 장기는 영화 ‘판도라'(박정우 감독)에서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판도라’는 한국영화 최초로 원전을 소재로 한 총제작비 155억 원 규모의 재난 블록버스터. 문정희는 발전소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는 재혁(김남길)의 형수 정혜를 연기했다. 분량만 놓고 보자면 그리 많지 않지만 영화의 중요한 갈등 축과 감정선을 도맡은 캐릭터다.
“분량에 대한 고민이 아예 없진 않았죠. 회사와 주변 사람들의 만류도 컸고요. 아마 박정우 감독이 아니었다면 출연 안 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군가가 이 역할을 해야 한다면, 누군가가 이 영화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면 제가 꼭 하고 싶었죠. 이토록 뜻깊은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에 힘을 보태고 싶기도 했고요.”
문정희는 박정우 감독의 데뷔작 ‘바람의 전설'(04)을 시작으로 ‘쏜다'(06), ‘연가시'(12)에 이어 ‘판도라’까지 네 번의 호흡을 맞췄다. 박정우 감독이 혹평에 시달릴 때도, 450만 흥행 신드롬을 일으킬 때도 배우로서, 동료로서 곁에서 든든히 힘을 불어넣어준 이는 바로 문정희였다. 박정우 감독이 “은인”이라 고마워할 만 하다.
“‘연가시’ 촬영할 때 ‘판도라’ 얘길 들었는데, 그러니까 4년 전이죠. 처음엔 ‘웃기고 있네. 원전? 이걸 누가 찍어요?’라고 했죠. 그때만 해도 원전이니 지진이니 하는 일이 피부로 와 닿지 않았을 때니까요. 시국에 대한 생각도 크지 않았고요. ‘판도라’ 때문에 전기 에너지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보며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죠. 저도 여름에 누진세 때문에 엄청 고생했거든요. 원전 에너지가 싸긴 하지만 처리비용은 후대들이 내야 하더라고요. 후대는 그들이 쓰지도 않은 에너지에 대해 엄청난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데, 억울하잖아요.”
정혜는 발전소 옆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영 불안하지만 시어머니 석여사(김영애)에게는 싫은 내색 한 번 않는 착한 며느리다. 하지만 발전소가 폭발하며 아들마저 남편처럼 잃게 될까 두려움에 휩싸이며 시어머니와 갈등을 빚는다. 이 갈등은 다소 급박하게 그려졌는데, 문정희의 섬세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연기력이 이러한 각본의 한계를 희석시켰다.
“대사 몇 마디로 그 갈등이 보일까 걱정 많았죠. 정혜가 발전소 폭발 소식을 듣고 시어머니에게 한순간 돌아서게 되잖아요. 조금 더 풍성한 스토리 라인을 쌓고 싶었는데 여건상 쉽지 않았죠. 관객들이 이질감을 느낄까 봐 조심스러웠는데, 따지고 보면 아이까지 피폭으로 잃을 수 있단 생각을 하면 그렇게 확 돌아설 수도 있다고 봐요. 물론 영화에 그렇게까지 못되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웃음)”
문정희는 얼마 전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갔다. 단 한 번도 행동하는 시민이었던 적이 없던 그이지만 이번엔 참기 힘들었단다. 세월호 때문이었다.
“저처럼 작은 입장이라도 힘을 보태는 게 필요하겠더라고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참여한 거예요. 결국엔 이 모든 일이 세월호 7시간으로 가게 될 것 같은데, 세월호 참사는 제가 일생동안 겪은 가장 쇼킹한 일이었거든요. ‘판도라’ 찍을 때가 딱 2014년이기도 했고요. 꼭, 부디 이번 일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김수정 기자 swandive@tvreport.co.kr 사진=문수지 기자 suji@tv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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