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안이슬 기자] “이건 내 역할이야!”
작품에 임할 때 지진희는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일종의 최면이다. tvN 월화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도 그런 마음으로 마주했다. 그렇게 그는 딱 맞는 수트를 입은 것처럼 완벽하게 박무진이 됐다. 시청자들의 호평과 최종회 시청률 6.2%(닐슨코리아)라는 만족스러운 결과가 그 방증이다.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지진희를 만났다. 유쾌하게 취재진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60일, 지정생존자’에서 항상 압박감에 시달리던 박무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가 박무진을 연기할 때 가장 경계한 것은 현실의 지진희가 개입되는 것이었다. ‘나 같으면 이렇게 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합리적이고 데이터를 믿는 박무진 캐릭터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 물론 지진희와 박무진의 닮은 점도 있다.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스포츠가 재미있는 건 규칙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규칙 안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했을 때 ‘와, 대단하다’라고 느끼는 것이거든요. 규칙 없이 잘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 규칙을 깨는 순간 아수라장이 되는 거죠. 규칙이 있기 때문에 스포츠가 재미있는 거고 그 안에서 내가 행동을 제대로 했을 때 제대로 굴러간다는 마음이 지진희에게도 있어요.”
’60일, 지정생존자’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 됐다. 권한대행 자리에서 물러난 박무진에게 보좌진들이 찾아와 대선 주자로 나서달라했지만, 박무진은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모든 배우들이 그랬겠지만, 지진희도 스스로 상상해본 엔딩이 있었다.
“저만의 엔딩은 제가 가장 멋있게 보이는 엔딩이었죠.(웃음) 하지만 얘기는 안했어요. 조금이라도 신경 쓰실까봐. 제가 생각한 건, 처음에는 ‘안녕하십니까. 권한대행 박무진 입니다’라고 했잖아요? 엔딩에서는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대통령 박무진입니다’라고 하는 거였어요. 그러면 굉장히 멋있게 보이지 않을까하는 욕심이었죠. 물론 저희 드라마와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진희는 최근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60일, 지정생존자’의 박무진 역할에 대해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20년의 배우 생활을 통해 터득한 자신만의 즐겁게 일하는 방법이다.
“그런 마음이 없이 일을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나에 대한 최면이고, 에너지 같은 거예요. 신인 때는 불안감이 많았어요.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겼고,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그 중 하나가 자신감 하나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맞아, 이건 내 역할이야!’라고 생각하면 시작 자체가 달라요. 촬영장 가는 순간이 달라져요. 흔들리지 않고 즐겁게 연기할 수 있죠.”
그를 두고 ‘사인회 가기 어려운 배우’라는 우스갯 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다. 광고하는 상품들이 보험, 유산균 등이기 때문에 CD를 구매해야하는 아이돌 사인회와는 참여 방식이 다르기 때문. 사인회에서 주고 받는 이야기도 독특하다. “혹시 보험 드셨어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인회가 어디 또 있을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성실히 수행하는 거죠. 사인하면서 혹시 보험 안드셨으면 과한 거 말고 필요한 거 드시라고 하고요. 유산균도 제가 먹어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걸 얘기해주는 거예요. 제 경험에서 말씀드리는 거죠. 불편하셨을 수도 있을 거예요.”
레고, 클라이밍, 그림, 도예, 야구, 사진 등 연예계 대표 취미부자로 알려진 지진희. 그의 최근 취미는 골프다. 그는 골프를 치며 스트레스를 풀지만, 반대로 골프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참 아이러니한 게, 골프로 또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런데 마음 맞는 사람들과 몇 시간 동안 숲속을 걷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 자체로 힐링이 되고 스트레스를 푸는 거죠.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성취했을 때의 기쁨도 있고요. 이 과정이 살아가는 과정이랑 똑같은 것 같아요.”
이제 막 ’60일, 지정생존자’를 마친 그에게 또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다. 항상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고, 때론 고배를 마시며 극복하는 것의 연속이다. 그걸 극복하는 것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기다림의 연속이 다시 시작되는 거예요. 계속 기다리면서 ‘아, 이거 정말 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이 됐네. 나 잘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거죠. 이걸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제 몫인 거예요. 절망하고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찾고 준비하는 그 과정이 또 시작되는 거예요. 쉽지 않아요. 고통스럽죠. 하지만 그 고통 끝에 좋은 작품을 만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극복해 나가는 거예요.”
안이슬 기자 drunken07@tvreport.co.kr / 사진=김재창 기자 freddie@tv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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