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수정 기자] “외롭고, 괴롭고, 처절했다”
배우 천우희에게 영화 ‘우상'(이수진 감독) 련화로 살아온 7개월은 “외롭고, 처절하고, 괴롭고, 어렵고, 당황스러운” 순간들로 가득했다. 그 어떤 힘든 작품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꼿꼿이 제 자리를 지켜냈던 천우희에게도 ‘우상’의 세계는 매순간이 도전이고 넘어야 할 산이었다.
‘우상’은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 남자(한석규)와 목숨 같은 아들이 죽고 진실을 쫓는 아버지(설경구), 사건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여자(천우희)까지, 그들이 맹목적으로 지키고 싶어 했던 참혹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한공주’로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한 이수진 감독의 차기작이다. ‘한공주’로 제 이름 석자와 가치를 알린 천우희는 ‘우상’으로 이수진 감독과 다시 만났다.
천우희가 연기한 련화는 생존을 위해 돌진하는 인물. 한국영화 사상 전무후무한 캐릭터인 만큼 캐스팅도 쉽지 않았다. 천우희 역시 이수진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를 건네받은 뒤 “누가 이걸 하겠나”라고 했단다. 반대로 말하면 천우희이기에 가능한, 천우희만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영화 ‘마더’, ‘써니’, ‘한공주’를 거쳐 ‘뷰티 인사이드’, ‘곡성’에 이르기까지. 천우희는 분량과 장르에 상관없이 영화를 장악하는 힘을 지녔다. ‘우상’에선 천우희의 가치가 정점에 이른다. 힘들고 고된 순간의 연속이었기에 천우희의 이러한 열연은 더욱 빛을 발한다.
■ 다음은 천우희와 일문일답
-‘우상’은 불친절한 영화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긴 했다. 모든 영화가 친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수진 감독님은 늘 새로운 고민, 본질에 관심이 많다. 감독님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이 불친절해 보일 순 있겠지만 말이다.
-련화는 비주얼부터 충격적이었다. 눈썹은 직접 밀었나.
원래는 눈썹을 한 번만 밀면 됐는데 생각보다 촬영이 길어졌다. 눈썹이 제대로 자라는 데 한 달 반 정도 걸린다. 칩거했다.(웃음) 감독님께서 눈썹 미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편하게 말씀하시는 게 얄미워서 감독님께도 같이 밀자고 했더니 진짜 눈썹을 밀고 오셨더라. 현장에 눈썹 없는 사람이 두 명이나 무섭게 있었다.(웃음)
-소문대로 집요한 감독이다.
집요한 감독님과 작업을 많이 해서 그런지 단련돼 있다. 내 성격 자체도 힘든 일에 지치기보다 발동이 걸리는 타입이다.
-집요함 하면 ‘곡성’으로 함께 한 나홍진 감독을 빼놓을 수 없는데.
나홍진 감독님이 불 같다면, 이수진 감독님은 물 같다. 나홍진 감독님은 배우 개개인 특성을 굉장히 잘 알아채고 거기에 맞춰주시는 편이다. 설명도 많이 해주신다. 반면 이수진 감독님은 말이 아닌 ‘뭔가’로 보여주신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분 모두 집요하고 섬세하고 순간적인 연기의 느낌을 잘 포착하신다는 점이다.
-한석규가 현장에서 “너무 몰입하지 마”라고 했다고.
제 눈썹을 보시더니 “어휴, 우희야. 이게 뭐냐.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몰입은 그만해”라고 하시더라. 선배님이 보시기엔 내가 이렇게 스스로 몰아가다 혹여라도 제 풀에 죽을까 걱정하시는 것 같다. 선배님께선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불은 너무 미약해도, 너무 활활 타올라도 없어지잖아.
-극 중 한명회(한석규)가 련화의 발가락에 주사를 놓는 장면에서 사고가 났다. 당시 상황이 어땠나.
그 시퀀스는 5일 동안 찍었다. 눈에 붙인 청테이프를 계속 뗐다 붙였다 하니 피부가 상해서 10시간 동안 붙이고 있었고, 화장실도 참아야 했고, 온몸에 한기가 들고, 눈도 다 짓무르고. 한계였다. 더 이상 못 하겠더라. 공황장애 비슷한 게 오기까지 했다. 그러던 와중에 마지막 날 사고가 난 거다. 뭐가 발가락에 쑥 들어오는데 느낌이 싸했다. 하지만 선배님의 장면이기에 망치기 싫었다. 참았다. 청테이프를 떼고 보니 발에서 피가 철철 나더라. 선배님도 놀라셔서 이게 무슨 일이냐며 화내시고. 알고 보니 스태프가 소품용 주사기가 아닌 진짜 주사기를 갖다 놓은 실수를 한 거였다. 바로 병원에 가 파상풍 주사 맞고 치료받았다.
-천우희에게 ‘우상’은 어떤 기억으로 남나.
많이 괴로웠다. ‘한공주’가 내 가능성을 열어줬다면, ‘우상’은 한없이 내 자신감을 추락시킨 작품이다. 주변 상황에 영향을 안 받는 편인데도 ‘우상’을 찍으면서 스스로 컨트롤이 안 될 때가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스스로 당황했다. 물론 촬영장에서는 웃으며 지내려 노력했다. 고민은 있어도 그것을 신세 한탄하거나 분노하는 걸 안 좋아한다.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당한 것은 얘기해도 불편한 걸 얘기하진 말자는 게 배우로서 내 소신 중 하나다. 그럼에도 ‘우상’은 심적으로 힘들었다.
-어떻게 극복했나.
극복이 됐는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의욕을 잃은 적이 없었다. 처음엔 열의를 갖고 시작하다가 중간에 고(故) 주혁 선배님 일을 겪으면서 모든 게 다 부질 없어졌다. 작품을 위해 내 한 몸 불사 지르겠다는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부질없더라. 그때부터 무너졌다. 지난해 작품 선택을 아예 못 했다. 선택할 자신이 없더라.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했지. 회사에서도 유튜브 브이로그로 가볍게 환기를 시키길 바랐고.
-유독 힘들었던 ‘우상’을 함께 버틴 한석규, 설경구에 대한 고마움도 남다르겠다.
현장에서 두 분의 자세, 따뜻함이 정말 좋았다. 나도 원래 외부적인 것에 흔들림이 없는 타입인데, ‘우상’에선 유독 돌발상황이 많았다. 그럴 때 심적으로 컨트롤이 안 돼 힘들었는데 선배님들은 그런 순간에도 연기를 다 해내시더라. 내공이 대단하시다. 존경스럽고 한편으론 부러웠다. 스스로가 못 미더운 순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 평가에 흔들리는 순간을 버텨내셨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것 같다.
김수정 기자 swandive@tvreport.co.kr 사진=CGV아트하우스 제공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