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수정 기자] 김혜수라는 이름 석자가 지닌 의미는 남다르다. 그는 성공한 여성 배우가 후배들에게 어떤 식으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김혜수는 이를 ‘연대감’이라 표현했다. 치열한 충무로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후배 배우들을 독려하고 끌어내 준다. 그가 무명배우 리스트를 휴대전화에 갖고 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최국희 감독)은 IMF 협상 비하인드를 그린 작품. 김혜수는 가장 먼저 국가부도 위기를 예견하고 대책을 세운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을 연기했다. 굳건한 신념으로 맡은 바 제 소임을 다하는 인물로, 카메라 밖 김혜수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항상 깨어있는 눈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엔딩 내레이션 역시 김혜수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김혜수는 “실패한 작품에서 많이 배우는 편이다. 나는 오랫동안 천천히 성장했다. 10년 이상 걸렸다. 지금도 많이 두렵고,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작품을 통해 조금씩 더 견고해지려 노력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 다음은 김혜수와 일문일답
-출연 계기가 궁금하다.
IMF 당시 비공개 대책팀이 있었다는 단 한 줄에서 시작한 이야기다. 흥미로웠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화가 나더라. 충격적이었다. 부디 이 영화가 반드시 만들어지길 바랐다. 심지어 재밌게 만들어지길 바랐다.
-한시현의 진정성은 영화를 이끄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물론 한시현은 뭔가를 주도적으로 하려는 굉장히 멋진 여성이다. 나는 한시현이 자신이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내려는 인물이라고 봤다. 한시현의 대사는 일상 언어가 거의 없다. 진심이 없다면 전형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장애가 되는 것은 모두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언어, 즉 영어 대사 부담감을 줄여야 했다. 부담감이 진심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거든. 진심을 가공하지 않고 전하길 바랐다.
-“비서 아니었어?”라는 대사가 씁쓸했다. 상업영화에서 오랜만에 보는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나리오만 봤을 땐 한시현이 재밌고 새로운 캐릭터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 있었다. 한시현은 원칙에 의해 움직이고 소신껏 살아가고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내는 인물이다. 그게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질 수도 있잖나. 인물의 행간을 찾아 생명력을 채우는 게 필요했다.
-여성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됐다.
반가운 일이다. 제작자가 여성이고, 현장 PD도 여자였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이 작품을 통해 정말 멋진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보잔 얘길하지 않았다. 염두에 둔 적 없다. 다만, 모두가 이 영화의 목표와 진심을 놓치지 말자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 마치 한시현처럼 말이다. 나를 포함해 제작자, PD 모두 한시현이 여성임을 강조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다. 묵묵히 제 일을 하는 와중에 탄생한 결과물이다. 너무 의도하면 의도에 매몰돼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왜곡시킬 수 있다.
-영어 대사 준비는 어떻게 했나.
툭 치면 툭 나올 정도로 연습했다. 워낙 협상 장면이 중요했기 때문에 부담감이 컸다. 일상영어가 아니다 보니 우리말로도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했다. 말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야 했기 때문에 일단 경제 수업부터 들었다. 영어는 4개월 반동안 연습했다. 매일 2시간 정도.
-뱅상 카셀과 주고받는 긴장감이 대단했다.
일단 좋은 배우다. 뱅상 카셀이 우리 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이 내게도 큰 뉴스였다. 뱅상 카셀은 IMF와 당시 한국 상황에 관심이 많았다더라. IMF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드는 한국영화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았겠나. 거기서 오는 긴장감도 있었다. 앞으로 언제 뱅상 카셀과 연기 호흡을 언제 또 맞추겠나. 그의 미묘한 표정, 포즈,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 했다.
-최근 행보를 보면 굉장한 자신감을 갖고 필모그래피를 쌓는 느낌이다.
뭔가를 결정하면서 확신이 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늘 두렵다. 어렸을 때 연기 못한다고 혼나고 힘들었을 때, 선배들이 대단해 보였다. 이걸 다 어떻게 견뎠나 싶더라. 이젠 내가 같은 질문을 받는다. 너무 힘든데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냐고. 난 솔직하게 얘기한다. 답은 없다. 나도 아직도 너무 무섭고, 내 것 하기 바쁘다고.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엔딩에 등장한 한지민은 최적의 캐스팅이었다.
후배 여성 배우들을 보면 연대감이 느껴진다. 마음이 딱 맞는 연대감이랄까. 이입이 된다. 얼마나 눈물나는 일인지 알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에 뿌듯하고 고맙다. 사실 친분이 없으면 작품 좋았다, 연기 좋았단 얘기를 먼저 꺼내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먼저 그런 말을 하는 건 힘든 일을 해낸 후배들에 대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김혜수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에 책임감과 부담감은 없나.
웬만하면 생각 안 하려고 한다. 알아도 모른 척 하고 싶고, 사실 잘 모르기도 하고.
김수정 기자 swandive@tvreport.co.kr 사진=호두앤유엔터, 강영호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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