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은정 기자] “나의 벚꽃 동산이여, 안녕.”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유작 ‘벚꽃 동산’이 약 3주간 관객들을 만났다. 시대의 변화와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1903년부터 지금까지 120년 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극에는 귀족, 지식인, 평민, 농노의 아들, 시종 등 여러 계급의 캐릭터가 등장하여, 각자의 처지에서 변화를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다.
‘희극’이라는 주석을 달고 있지만, ‘사실주의 대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답게 삶의 희극성과 비극성이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녹아 있다. 혁명 전후,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가치관이 뒤섞였다. 여전히 과거에만 사로잡혀 있는 귀족은 몰락했고, 변화된 현재를 살며 성장하는 상인 계급은 큰 부를 손에 쥐게 됐다.
‘명확함’을 지향하던 김광보 예술감독은 30년 만에 처음 체호프 작품을 연출했다. 김 감독은 인간의 몰락과 부상이 공존하는 이 작품에서 라네프스카야 캐릭터에 집중했다. 몰락한 귀족이자 벚꽃 동산의 지주인 라네프스카야는 재정 위기에도 “이 집을 사랑한다. 벚꽃 동산이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니 꼭 팔아야 한다면, 이 동산과 날 함께 팔라”면서 옛 영광을 잊지 못한 인물이다.
김 감독은 기존에 사치와 향락에 젖은 캐릭터로만 주로 묘사되었던 라네프스카야를 보다 깊이 있게 분석하여 인물의 입체성을 살렸다. 극 중 라네프스카야는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으로 표현되지만, 한 시대의 낭만을 품고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내며 메시지성을 강조했다.
라네프스카야의 도태는 곧 시대의 변화를 의미한다. 시류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에 텅 빈 시간이 갇혀 초라한 엔딩을 맞이했다. 매년 봄 피고 지는 화려한 벚꽃처럼, 인간에게는 ‘만개’할 제 시간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보폭을 늘려 미래로 향해도 어느 순간에는 뒤처지고 낙오되는 시점이 찾아온다. 슬프고 아름다운 인생, 그것이 정해진 섭리다.
‘벚꽃 동산’은 배우 백지원의 5년 만의 연극 무대 복귀작으로 주목받았다. 최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치얼업’, 영화 ‘드림’ 등에서 활약했던 그는 오랜만에 선 무대에서 관록의 연기를 펼쳐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극의 중심이 된 ‘현실 감각 없는 귀족’ 라네스프스카야를 실제적으로 표현하여 시대성을 반영했다.
백지원은 “라네프스카야는 세상의 모든 가치가 사랑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다가오면 사랑으로 도망친다. 사랑을 좇는 사람으로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물이 겪는 변화 속 혼란과 상실, 그 안에 녹아있는 슬픔과 현실성을 다각도에서 연기해 공감도를 높였다.
안과 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저택 세트와 화려한 샹들리에, 흰 천으로 덮인 남겨진 혹은 버림받은 것들.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 아무것도 없군. 아무것도.” 홀로 갇혀버린 하인 피리스의 공허한 마지막 대사가 인생의 성찰을 느끼게 한다.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나’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안톤 체호프의 4대 명작으로 손꼽히는 ‘벚꽃 동산’은 28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내리며, 추후 국립극단 온라인 극장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김은정 기자 ekim@tvreport.co.kr / 사진=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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