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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박해수의 진가 [리뷰]

김은정 기자 조회수  

[TV리포트=김은정 기자] 5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박해수의 모습은 여전했다. 빛나는 눈빛,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우라, 카리스마 넘치는 행동까지 어느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영상 매체로는 전달되지 못했던 살아있는 연기와 날 것의 에너지로 관객을 매료했다.

배우 박해수는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가 쓴 필생의 역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극 ‘파우스트 part.1′(이하 ‘파우스트’)에서 인간을 두고 신과 내기를 펼치는 악마 ‘메피스토’로 분했다. 고전의 틀에서 벗어나 현대적 미학을 추구한 그의 메피스토는 섹시함 마저 느껴지는 악으로 형상화 됐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수리남’ 등으로 얼굴을 알린 박해수는 사실 2007년 연극 ‘안나푸르나’로 데뷔해 무대 위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갈매기’ ‘프랑켄슈타인’, 뮤지컬 ‘영웅’ ‘여신님이 보고 계셔’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과거 작은 소극장에서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공연을 하기도 했던 박해수는 팬데믹 시기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글로벌 대히트로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바쁜 나날을 보낸 뒤 오랜만에 무대에 선 그는 기분 좋은 떨림과 긴장감을 이겨내고 공연장 전체를 장악했다.

예전부터 메피스토 역을 꿈꿔왔다는 그는 ‘악(惡)이 악으로 비춰지지 않은 현 시대’에 부합하는 악마를 표현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완성했다. 과거 악이 자신을 숨긴 채 인간을 현혹했다면, 지금은 악마 정체를 드러내고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선택권을 쥐여주는 식이다.

메피스토가 신에게 내기를 제안하는 첫 장면부터 박해수는 강렬하다. MBC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공개 후 화제가 된 “마이크 좀 달라”는 그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짜릿한 전율에 휩싸인다. 전지전능한 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천상의 문제아다운 패기로 신에게 반(反)하는 모습은 단숨에 관객들의 호흡을 빼앗는다. 특히 현대 무용으로 그려낸 신의 존재는 무한함과 몽환적 분위기로 메피스토와 분명한 차별을 뒀다.

모든 걸 다 깨우쳤다고 생각하는 학자 파우스트는 인생의 쾌락을 알려주는 대가로 영혼을 요구한 메피스토의 거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인간의 마음과 욕망 따위는 모두 예상했다는 듯 메피스토는 파우스트 대신 교수가 되거나, 술집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등 마술을 부려 인간 세계를 교란한다. 장난처럼 사람을 죽이며 악마의 기질도 드러내지만, ‘앗 실수, 사실 일부러 그랬지만’ 같은 서브텍스트가 읽히도록 빈틈없이 연기하며 악마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박해수 특유의 깨알 연기는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로맨스를 즐기는 젊은 파우스트와 그레첸 뒤에서 억지 데이트를 하는 메피스토의 질색팔색 표정은 웃음을 자아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잔망스러움과 순발력 있는 리액션이 그의 연기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메피스토의 묘사를 위해 맹수와 유명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동작을 참고했다는 그는 소품 산을 이리저리 타고 날아다니며 인외의 기묘한 움직임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존재.’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진 이 시대에 ‘파우스트’는 어떤 메시지를 남길 수 있을까.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한 박해수는 ‘선악을 구별하는 분별력’에 초점을 두었다. 유혹의 열매는 달지만, 그 끝은 파멸이니 결국 선과 악에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며 방황하더라도 잡아야 할 손을 의심하거나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오래된 고전 괴테의 ‘파우스트’는 양정웅 연출의 손에서 현대적이고 감각적으로 재탄생했다. 특히 텍스트로 고전의 맛을 살리되 시각적인 효과를 통해 연극 진입 장벽을 낮추려 힘을 쏟았다. 거대한 LED 패널을 활용하여 신의 영역과 정령들을 표현하고, 현실세계를 상징하는 4대 원소 중 흙은 다량의 코르크로 구현해 스펙터클한 무대를 완성했다. 또 빛과 어둠의 메타포를 통해 현실과 초현실을 구분하여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녹여 보는 재미를 더했다.

이뿐만 아니라 무대 위 배우와 영상 속 배우가 대화를 주고받는 파격적인 시도로 눈길을 끌었다. 백스테이지에 마련된 세트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라이브 영상 송출하는 시네마 시어터 기술을 적용한 것. 낯선 풍경인 만큼 관객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온전히 무대 위 연기를 보고 싶다는 주장과 오히려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어 좋다는 의견이 공존했다. 연극의 매력이 동시성에 있다는 점에서는 영상을 통한 연기가 아쉽지만, 무대라는 공간의 제약을 해제하는 방향의 기술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 시도다.

악마의 유혹은 치명적이다. 그 악마가 박해수라면 더욱 그렇다. 연극 무대 위 그를 목격하고 경험했다면 화면 속 갇힌 연기가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발걸음과 얽매이지 않은 시선, 한계 없는 감정의 발산과 한순간 빨려 들어가는 표현력까지. 4주간 무대를 지킨 메피스토는 곧 사라진다.

인간의 고뇌와 욕망, 본능을 담아낸 양정웅 연출의 연극 ‘파우스트 part.1’에는 메피스토 역 박해수를 비롯해 파우스트 역 유인촌, 젊은 파우스트 역 박은석, 그레첸 역 원진아가 원캐스트로 출연한다. 오는 29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

김은정 기자 ekim@tvreport.co.kr / 사진=LG아트센터, ㈜샘컴퍼니, ㈜ART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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