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지현 기자] 연기, 대본, 연출.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됐을 때 이를 웰메이드라고 부른다. 수작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모두가 제 자리에서 역할을 해줬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대본이다. 기초공사가 부실한 건물은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법. 시나리오가 따라 주지 않으면 배우의 연기도,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도 묻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 김은희 작가의 대본이.
김 작가는 최근 진행된 인터뷰 자리에서 기자에게 9회 대본을 선물했다. 수개월 동안 가족과의 만남을 절제하며 고립돼 쓴 대본이었다. A4 용지 크기의 대본은 총 21장으로 구성됐다. 대사로만 가득한 다른 대본들과 달리, 지문이 상당히 디테일한 편이었다. 소품으로 등장한 메모지 속 멘트조차도 허투루 쓰여 있지 않았다. 방송 편집본과 맞춰서 보니 그녀의 필력에 저절로 감탄이 났다.
# 씬/21 N 과거, 진우의 집/화장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우울해 보이는 여성 손님만 골라 살인을 하던 진우(이상엽)를 기억하시는지. 그의 행각은 대본에서도 섬뜩했다.
“얼굴에 검은색 비닐 봉자가 씌워진 상미, 모로 누운 자세. 손이 뒤로 묶여있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오래된 듯, 낮은 조도의 백열등…”
지문에는 살인 장소, 피해자의 자세, 살인의 방법 등이 꽤 구체적으로 쓰여있다. 해당 지문과 관련한 방송 분량은 1,2초에 불과하지만 공포를 조장하는 전체적 분위기와 디테일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극의 전체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섬세함이 연출과 연기에 도움을 준다는 걸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씬/8 D, 과거, 형기대 사무실
휼륭한 배우는 적절하게 애드리브를 사용할 줄 아는 법이다. 조진웅이 그랬다. 짧은 대사에 애드리브를 섞어 맛깔나게 분위기를 살리는 배우였다
“수현 : 근데 얼굴이… 보이십니까? 전 안 보이는데… 이걸루 어떻게 잡으실려구요? 재한 :강력계 형사가 얼굴로 잡냐? 근성으로 잡지.
분명 대본 속 재한(조진웅)의 대사는 짧은 이 한마디뿐이다. 그런데 조진웅은 이를 변주했다. 수현(김혜수)을 째려보며 “아이 새끼, 강력계 형사가 얼굴로 잡냐? 근성으로 잡지. 가! 어서 일해. 가!”로 변형시킨 것. 재한과 수현의 러브라인이 돋보였던 건, 대본에 숨겨진 감정선을 읽어내는 배우들의 노련미 덕이었다.
#씬/15 D, 수현의 집/거실/주방/수현의 방
‘시그널’ 팬이라면 수현의 어머니가 박해영(이제훈)을 사윗감 보는 듯 사랑스러운 눈길로 보는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허리를 다쳐 소파에 누운 수현의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돕던 박해영은 수현의 방에서 우연히 과거 재한이 수사했던 사건 일지가 기록된 수첩을 발견하고, 한 장의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는다.
“재한이 담당했던 소매치기 절도 등의 사건들이 두서없이 적혀 있는데 표지에 꽂혀 잇는 빛바랜 메모지를 발견한다…얼굴 빛 굳고…”
김 작가는 모든 신을 상당히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편이었다. (메모지를 발견하고 주머니에 넣는다)와 같은 간단한 묘사가 아니라, 메모지에 멘트들과 이를 발견한 주인공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묘사하며 대본에 빈틈을 없게 만들었다.
물론 대본은 한 번에 탈고되지는 않는다. 1부부터 16부까지 모든 대본은 수정에 수정을 거쳐 완성됐다고 한다. 현장을 지휘하는 김원석 감독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고, 전화를 받으면 즉시 현장에 맞게 대본을 수정하기도 한다고. ‘시그널’이 한국 최고의 장르물이라는 평가를 받은 건 이같이 피와 고름을 짜 만든 김 작가의 대본과 이와 시너지 효과를 낸 배우, 감독들의 노력 덕이었다.
김지현 기자 mooa@tvreport.co.kr /사진=’시그널’ 9회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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