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박현민 기자] JTBC ‘부부의 세계’의 논란은 변화하는 시대의 젠더감수성의 속도를 작품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데서 비롯됐다. 아니, 따라올 의지가 결여된 채로 오히려 퇴보한 모양새다. 김희애 배우를 앞세워 한국의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처럼 보였던 ‘부부의 세계’는 단 8회 만에 정반대의 문제에 직면했다. 고급 스릴러물, 심리물인 것처럼 포장됐지만 결과적으로 일찍 밑천이 드러나버린 셈이다.
지난해 버닝썬 사태가 불거졌고, 올해는 ‘n번방’ 사건이 수면 위에 올라와 공분의 대상이 됐다.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부부의 세계’는 과연 2020년 드라마라가 맞는지 의심될 소재를 곳곳에 배치했다. 논란을 촉발시킨 지선우(김희애 분)를 대상으로 한 폭행 장면의 1인칭 시점 연출 역시도 시청률을 올릴 자극적 소재가 최우선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는 과거 데이트 폭력 가해자의 논리를 부여해 철퇴를 맞았던 tvN ‘나의 아저씨’의 논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원작인 영국 드라마가 존재하고,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용했다는 것은 합당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범죄 VR게임을 연상케 한 문제의 장면은 원작에 없던 연출 방식이다. 원작과 상이한 부분은 또 있다. 레스토랑 매니저가 손제혁(김영민 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성(性)을 대가로 명품백을 요구하는 여성으로 그린 것 역시 시대착오적 설정이자 여성혐오를 내포한 문제적 소재다.
해당 문제에 대한 지적이 SNS와 시청자게시판 등에 잇따르자 “예민하다”는 반대급부의 반응이 재차 고개를 드민다. 과거에 문제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을 뒤늦게 깨닫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의 덜미를 붙드는 행태다.
논란이 무색하게 ‘부부의 세계’는 8회 방영 만에 시청률 20%(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를 넘어섰다. 원작을 참고하면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 역시 예상을 뒤엎는 파격 일색이 확실하다. 단순히 논란 만으로 흥행을 만들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영국에서 지난 2015년에 만들어진 ‘닥터 포스터’가 2020년 한국의 ‘부부의 세계’로 재가공되는 과정에서 조금은 진일보한 성인지 감수성이 부여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박현민 기자 gato@tvreport.co.kr /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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