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연주 기자] 영화에 담긴 n개의 화두 가운데 함께 나누고 싶은 재미를 선별했습니다. 사심을 담아 고른 한 편의 영화 속 단 하나의 재미, 유일무비입니다. *이 기사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환상이 깨져버린 기분이랄까. 판빙빙과 이주영이라는 전례 없는 조합이 싱거울 수 있다니.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게 없는 ‘녹야’의 이야기다.
영화 ‘녹야’는 인천 여객항 보안검색대에서 근무하는 이방인 진샤(판빙빙 분)가 자신과 달리 자유로워 보이는 초록머리 여자(이주영 분)를 만나 인생에 큰 변화를 겪는 여정을 그린다. 앞서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 공식 초청돼 화제를 모은 작품으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을 통해 국내에 첫 선보이게 됐다.
진샤와 초록머리 여자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 성향, 삶의 대처 방식까지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관계를 맺는 데 다름은 어떠한 방해가 되지 않는다. 첫 만남부터 강한 끌림을 느낀 두 사람은 삽시간에 서로에게 깊게 빠져든다.
두 사람을 연결한 고리는 소외다. 진샤와 초록머리 여자는 폭력을 가까스로 피해 살아간다. 진샤는 시민권을 얻지 못한 이방인으로 폭력적인 남편의 그늘 아래 머무르고, 초록머리 여자는 불법 약물을 밀수입하면서 삶을 이어간다. 그런 두 사람을 구제해 줄 사람은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구원자가 된다.
소외된 이들의 연대는 통쾌하다. 무력했던 이들이 펼치는 폭력에 대한 대항, 옥죄던 존재를 처단하는 서사는 소위 ‘먹히는’ 소재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녹야’는 소외, 여성, 연대라는 소재에 그저 의존한단 느낌이 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여성이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엔 빈틈이 많다. 개연성, 관계성이 뚝뚝 끊겨 있다. 요리 과정이 편집된 요리 프로그램을 보는 기분이다.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 92분 동안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판빙빙과 투톱으로 활약한 이주영의 연기 또한 아쉽다. 진샤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만한 초록머리 여자의 매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파격적인 변신을 요구하는 캐릭터임에도 이주영의 전작인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영화 ‘브로커’, ‘메기’ 등에서 보여준 연기와 다르지 않은 게 문제다.
이 영화에 걸어볼 기대는 단연 판빙빙이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판빙빙의 얼굴엔 진샤의 아픔과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지금까지 보여준 화려한 모습을 벗어던진 채, 인생이 무채색으로 물든 한 여자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김연주 기자 yeonjuk@tvreport.co.kr /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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