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수정 기자] 영화 ‘순애'(정인봉 감독)는 전화기를 붙들고 전전긍긍하는 순애(김혜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밥 한 끼 할 생각에 조심스레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이들 학원 데려줘야 해 바쁘다”라는 빤한 핑계뿐. 순애는 전화기 너머 아들의 싸늘한 반응에 눈에 윤기가 돌지만 애써 눈물을 삼킨다. 오히려 “바쁜데 미안하다”라고 사과하며 달력에 적힌 ‘내 생일’을 쓸쓸히 쓰다듬는다.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경쟁 부문 초청작 ‘순애’는 외롭고 무료한 세월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보내는 순애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엄마의 삶에 들어선 이후 오롯이 제 이름으로 불릴 일 없던 순애는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케이크까지 사다 놨지만 함께 밥 한 끼 먹을 사람 없다. 아들은 구차한 핑계를 둘러대며 전화 끊기 바쁘다.
그런 순애는 가전제품 수리를 위해 집을 찾은 AS 기사들에게 생일 케이크와 정갈한 생일상을 차려준다. 세탁기를 수리하러 온 중년 엔지니어(박혁권)에게는 케이크와 직접 내린 커피를, 냉장고를 살피기 위해 찾은 젊은 엔지니어(온주완)에게는 정성껏 밥상을 차려 직접 생선살을 발라 따스한 밥 위에 얹어준다. 하지만 AS 기사들에겐 마치 자신을 친아들 대하는 순애의 과잉 친절이 영 불편하다.
순애는 노인들의 시위 때문에 늦어졌다고 불평하는 엔지니어에게 “노인들 할 일 없어 그런 거다. 늙으면 쓸데없어지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두렵다”라며 애써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쓴 커피를 삼킨다. 젊은 엔지니어는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순애’의 영제 ‘Her Secret Day'(그녀의 비밀스러운 하루)가 암시하듯, 영화의 말미 순애만의 비밀이 드러난다. 마치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생채기를 내듯 가전제품을 망가트리며 외롭고 슬픈 매일을 AS 기사의 방문으로 달랜다. AS 기사가 초인종을 누르기 전 곱게 분을 칠하고 예쁜 옷을 입는 게 순애의 유일한 낙일 테다.
국민엄마 김혜자는 섬뜩하고 슬픈 방법으로 외로움을 위무하는 순애를 특유의 전형적이지 않은 연기톤으로 그려냈다. 첫 등장부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김혜자의 섬세한 표정 연기는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박혁권과 온주완은 AS 기사만의 친절함과 순애의 관심에 불편해하는 감정을 짧은 분량 안에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순애’는 영화 ‘기다리다 미쳐’를 제작하고 단편영화 ‘상범시의 첫사랑’, ‘청춘’을 연출한 정인봉 감독이 연출했다. 러닝타임은 15분이다.
김수정 기자 swandive@tvreport.co.kr 사진=영화 ‘순애’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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