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수정 기자] 스마트폰 없던 시대의 연애는 어땠을까.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정지우 감독은 손 한번 잡기 그토록 어려웠던 그 시절의 떨리는 공기를 스크린에 소환했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라디오 ‘유열의 음악앨범’이 첫 방송됐던 1994년 10월 1일 우연히 만난 미수(김고은 분)와 현우(정해인 분)가 오랫동안 엇갈리고, 오해하고, 재회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오랫동안 침체기였던 한국 멜로영화. 정지우 감독은 트렌디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정통 멜로를 택했다. 영화 ‘사랑니’, ‘해피엔드’, ‘은교’, ‘4등’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늘 인물 사이 관계에 현미경을 들이밀었던 정지우 감독에게 청춘의 사랑보다 잘 어울리는 소재는 없을 터.
결과물은 역시나였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놀랍도록 섬세한 멜로 영화이자 ‘후진 내 모습’ 때문에 사랑이 쉽지 않았던 불안한 청춘에 관한 위로이기도 하다. 정지우 감독은 “연애는 상대를 통해 내 세계가 넓어지는 일”이라고 했다.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연애를 통해 가능한 가장 값진 기적이기도 하다.
최근 삼청동에서 만난 정지우 감독은 영화 반응이 좋은 만큼 인터뷰 내내 유쾌했다.
■ 다음은 정지우 감독과의 유쾌하고 솔직했던 대화
Q. 굉장히 사적인, 어찌보면 작은 얘기다. 투자받기 쉽지 않았을 텐데.
: 맞다. 시나리오부터 사적이고 내적인 묘사가 많았다. 큰 사건이 없잖아. 그럼에도 관객으로서 이 영화가 보고 싶더라. 작은 규모의 영화면 좋을 것 같았는데, 음악이 들어오며 영화 체구가 작아질 수 없는 구조더라. 저작권료에 더해 극장에서 상영할 때마다 공연료를 내야하는 구조이니.
Q. 시나리오 초고는 누가 썼나.
: 실제 7년간 ‘유열의 음악앨범’ 작가를 하셨던 이숙연 작가가 쓰셨다. 라디오 작가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라디오 변화 과정을 시나리오에 생생하게 담아주셨다.
Q. ‘후진 과거’ 때문에 꼬여버린 연애담이기도 하다.
: 맞다. 디테일한 경험은 다르더라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일상에서, 관계에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들.
Q: 첫 포옹, 첫 뽀뽀, 첫 하룻밤. 노출이라고는 정해인 뒤태밖에 없지만, 감독의 전작들보다 훨씬 더 야릇했다. 처음의 공기를 잘 포착했다.
: 으하하. 뒤태도 예사 뒤태는 아니잖아. ‘군대가기 전날밤’이라는 타이틀 아래 둘만의 밤인데도 현우에게 침대를 내주고 바닥에서 자는 미수다. 그 다음날 겨우 뽀뽀만 하잖아. 그것도 마치 뜨거운 것에 깜짝 놀라 금새 입술을 때는 것처럼.
첫 뽀뽀에서 하룻밤까지, 그 오랜 조마조마함이 계속되기 때문에 더 떨렸던 게 아닐까. 보는 입장에서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잖아.(웃음) 아, ‘차라리 이 장면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떨리니까.
손 한번 잡는 데까지 이토록 오래 걸렸던 시절이 있었고, 긴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요즘 관객들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Q: 김고은은 이미지와 달리 구수한 느낌이 있다. 그 매력이 영화 초반 잘 드러난 것 같은데.
: 맞다.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그런지, 그런 느낌이 확실히 있다. 영화 ‘계춘할망’ 봐라. 찰떡이잖아. ‘변산’에서도 그게 참 잘 드러났고.
Q. 김국희 배우가 연기한 은자 캐릭터가 눈에 띄더라. 멜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캐릭터임에도 감정적 울림이 컸다. 특히 미수가 은자에게 “왜 이렇게 살아”라며 울먹이는 장면의 임팩트가 강했다.
: 촬영 중 스태프가 딱 그 장면에서 울었다고 하더라. 촬영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 못한 반응이다. 어떤 감정적 버튼이 눌러지는 지점이 있나보다.
Q 천리안, 네이트온 대화명, 채팅 말투의 디테일한 묘사도 재밌었다.
: 철저한 고증에 입각했다. 원래 당시 천리안 첫화면에 ‘당신의 로또번호를 맞혀보세요’라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관객들이 지금의 로또로 오해할까 싶어 후반 작업에서 오히려 뺐다.
미수의 네이트온 대화명이나 채팅 말투는 구글에서 검색되는 그 당시 캡처본의 어휘본을 토대로 만들었다. 나는 제일 재밌었던 게 미수 아이디다. ‘misoo74’잖아. 현우에게 “나는 빠른 75″라고 하는 미수다운 아이디잖나. 본인은 74년생과 친구라는 것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긴 아이디다.(웃음)
Q. 박해준 배우가 연기한 종우는 자칫 잘못 그려지면 위험한 캐릭터다. 빤한 삼각관계가 될 수도 있었는데, 굉장히 근사한 어른으로 묘사됐다.
: 종우의 품격을 알아봐주셔서 감사하다.(웃음) 종우의 격을 잘 그려보고 싶었다. 아침 드라마 실장님처럼 그려지면 영화 전체가 무너지니까. 종우는 미수에게 “왜 기쁜 일이 있을 때 기뻐하지 못해”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미수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었거든. 종우는 좋은 어른이다.
나이 먹으니 그렇더라. 감정적으로 높낮이가 큰 사람보다, 단단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멋지더라.
Q. 연애, 사랑은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
: 믿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통해 내 세계가 넓어지는 것. 전혀 몰랐던 세계가 있었는데 상대를 통해 알아가는 것. 깊어지는 것. 바람둥이가 돼라는 말은 아니지만, 좋은 연애가 많은 인생이 행복한 인생인 것 같다.
Q. 차기작 계획은?
: 누가 누구 좋아하는 얘기하니까 만들면서도 재밌더라. 고민이 생긴 게, 나는 ‘4등’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 싶거든. 요즘도 한 달에 한두 번 이상 ‘4등’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한다. ‘4등’을 통해 정말 많은 소통을 했고, 뿌듯함을 느꼈다.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적 어젠다를 끌어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더라. 일방적으로 이게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어떤 마음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싶다.
김수정 기자 swandive@tvreport.co.kr /사진=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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