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리포트=강지호 기자] 약 5억 원의 제작비, 약 33명의 스태프, 14회차 촬영. 한국 영화의 높은 진입 장벽과 침체를 고민해온 이준익 감독이 작은 제작 시스템의 세로형 콘텐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3일 서울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14관에서는 세로형 시네마 ‘아버지의 집밥’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현장에는 배우 정진영, 이정은과 이준익 감독이 참석했다.
오는 9일 개봉하는 ‘아버지의 집밥’은 40년간 삼시세끼 집밥만 찾던 아버지 하응(정진영)이 ‘요리백지증’에 걸린 아내 순애(이정은)를 대신해 생애 처음 부엌에 들어서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고리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 ‘자산어보’, ‘동주’, ‘왕의 남자’ 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이번 작품으로 처음 세로형 콘텐츠에 도전했다. 정진영은 평생 밥상 앞 절대 권력자로 살아왔지만 난생처음 요리에 나서는 하응을, 이정은은 오랜 시간 가족의 끼니를 책임져오다 남편에게 부엌을 내주게 된 순애를 연기했다.
이날 이준익 감독은 첫 세로형 콘텐츠를 연출하게 된 계기부터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엄밀히 말하면 도전은 아니다”라며 “최근 한국 영화의 진입 장벽이 높고 여러 가지로 침체돼 있으니까 후배 창작자들이 작은 작품으로라도 자기 창작 의욕을 펼칠 수 있게 뒤에서 많이 응원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조감독이나 후배들한테 적은 제작비로 숏폼을 찍게 했더니 ‘왜 당신은 안 하냐’, ‘상업 영화 한다고 무시하냐’고 농담 삼아 부추기더라”며 “그래서 떠밀리다시피 하게 됐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참 잘했구나’ 싶다”고 웃어 보였다.
처음 마주한 세로형 콘텐츠의 문법은 기존 영화와 달랐다. 이준익 감독은 “기존 숏폼 작품들은 좀 자극적이고 짧은 시간 안에 흥미를 끌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내가 찍는 영화는 자극도 덜하고 폭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과연 이런 걸로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염려가 컸다”고 밝혔다.
가로에서 세로로 바뀐 화면은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지게 했다. 이준익 감독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림을 봐도 가로는 대부분 풍경화다. 그런데 세로 그림은 대부분 초상화”라며 “세로 화면은 한 인간의 내면을 아주 깊숙이 엿보는 듯하다. 가로보다 훨씬 더 내밀하고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제작 현장에서도 차이는 뚜렷했다. ‘아버지의 집밥’에는 약 5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됐으며 약 33명의 스태프가 14회차에 걸쳐 촬영을 진행했다. 이 감독은 “이 영화는 저비용이 강점이다. 이 작품은 조금 더 규모 있게 하는 바람에 한 5억 원 정도 들어갔다”며 “만약 세로가 아니라 가로로 찍었다면 아무리 적게 들어도 제작비가 5배 이상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장에 투입된 스태프가 한 33명 정도인데 가로로 찍으면 100명은 있어야 한다. 촬영도 우리는 14회차였는데 이 정도 가로 영화를 찍으려면 40회차 이상 해야 한다”며 “결과적으로 고비용과 저비용의 차이가 가로와 세로의 차이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좁은 프레임은 카메라와 미술, 소품부터 배우의 동선까지 제작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이 감독은 “좌우가 좁으니까 영화 제작에 투여되는 영역 자체가 좁다. 촬영 속도도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며 “심지어 인물의 동선도 좌우로 움직일 수가 없다. 아주 그야말로 컴팩트한 시스템이 세로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제작 규모가 작아진다고 이야기까지 작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준익 감독은 “규모가 작다고 이야기가 작을 수는 없지 않나”라며 “2시간 반을 끌고 간다는 건 그만큼 이야기의 풍부함을 보여줘야 한다. 시스템은 소규모지만 이야기의 밀도나 집중도에서는 상대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형태인 것 같다”고 바라봤다.
정진영 역시 화면의 크기나 형태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영화와 드라마, 세로형 콘텐츠를 각각 크기가 다른 ‘창’에 빗댔다. 정진영은 “영화가 커다란 통창이라면 드라마나 OTT는 아파트의 조금 작은 창이고, 이 작품은 작은 환기창이나 들여다보는 창 같은 느낌”이라며 “그런데 어떤 창이든 그 너머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고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결국 중요한 것은 이야기”라며 화면의 크기나 형식이 달라져도 좋은 이야기가 가진 힘은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준익 감독이 새로운 형식을 통해 들여다본 것은 결국 익숙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순애를 연기한 이정은 역시 실제 부모님의 삶에서 캐릭터의 모습을 발견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이정은은 “두 분이 어려운 시절을 겪고 인연을 맺어서 잘 사시다가 어느 순간 어머니의 반란이 시작되는 시점들이 있더라”며 “과거에는 아버지들이 어떤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면 세상이 바뀌고 어머니들이 나이 들어 섭섭한 마음을 푸는 모습도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면서 연기했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도 순애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정은은 “어머니가 ‘밥을 하기 너무 싫다.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하시더라. 아버지는 또 삼시 세끼를 꼭 집에서만 드신다”고 털어놨다.
또 “몇십 년 동안 감사함을 잘 모르고 ‘엄마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고, 집에서 밥은 꼭 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한번 생각해볼 것을 던지는 역할이라는 게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었다”며 “그런 마음을 대변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당초 스마트폰 화면을 위해 만들어진 ‘아버지의 집밥’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극장까지 영역을 넓혔다. 애초 제작 단계에서는 극장 개봉 계획이 없었다.
정진영은 “정말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전체를 쭉 붙여서 상영했는데 2시간 반이 넘었는데도 관객분들이 아무도 안 나가시는 거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날 이후 저녁을 먹으면서 ‘극장에서 하면 어떨까’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며 “숏폼 드라마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도 있지 않을까, 그런 관객을 찾아가자는 데 불현듯 의기투합했다”고 밝혔다.
이준익 감독도 “처음 만들 때는 극장에서 상영할 계획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다”며 “최근 극장에 나오는 영화 중 이런 가족 영화나 드라마에 충실한 작품들이 예전보다 많이 적어진 것 같다. 나이 든 관객들이 자기 나이에 맞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줄지 않았나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진행한 상영에서 이준익 감독은 작품과 맞닿은 관객들을 직접 확인했다. 그는 “극장에 들어갔는데 나보다 연세가 많은 70대, 80대 분들이 가득 차 계셔서 정말 놀랐다. 지난 10여 년 동안 극장 안에 그런 연배의 분들이 많이 모여 있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 모습을 보고 ‘맞아, 이렇게 자기 나이에 맞는 영화를 극장에서 함께 본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구나’ 싶었다”며 “연세 많은 분들뿐 아니라 손녀부터 자식, 며느리까지 온 가족이 함께 우리네 삶을 가까이서 엿보듯 즐겨줬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14편의 가로형 영화를 거쳐 처음으로 카메라를 세운 이준익 감독에게 ‘아버지의 집밥’은 여전히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나도 이게 처음 경험이라 어떻게 단정적으로 다 말씀드릴 수가 없다. 어쨌든 실험적인 것”이라며 “오늘도 보면서 새롭게 느껴지는 게 많다. 아무리 감독이지만 모든 걸 안다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너무 적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아버지의 집밥’은 오는 9일 롯데시네마에서 단독 개봉한다. 이후 17일 오후 5시 1부, 24일 오후 5시 2부가 레진스낵을 통해 순차 공개될 예정이다.
강지호 기자 / 사진= 영화 ‘아버지의 집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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