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연주 기자] “감독이 낸 문제를 잘 맞히고 싶다. 감독의 의도대로 캐릭터를 소화하는 게 배우의 임무다.”
배우 정유미는 작품에 대한 해석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작품은 감독의 영역으로 맡겨뒀다. 정유미의 스크린 복귀작 ‘잠’으로 첫 장편 데뷔를 앞둔 유재선 감독은 정유미의 태도를 극찬했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유재선 감독에게 감독을 믿고 따르는 정유미는 큰 힘이 됐다.
영화 ‘잠’은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이선균 분)와 수진(정유미 분)을 악몽처럼 덮친 남편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 잠드는 순간 시작되는 끔찍한 공포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2023년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제56회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제48회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돼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극중 정유미는 점점 극심한 몽유병 증세를 앓는 현수의 곁에서 메말라가는 아내 수진을 연기했다. 개봉을 앞두고 평단은 정유미의 스릴러 도전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동안 보여준 적 없는 새로운 얼굴을 선보인 그의 연기에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하 배우 정유미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언론 시사 이후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출연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영화가 세상에 나왔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다. 94분, 다소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한 편의 이야기다. 제가 연기한 수진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다. 소위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 연기라고 하던데, 더 갈 걸 그랬나 싶다. 사실 광기를 표현하려고 하진 않았다. 그런데 봐주시는 분들의 평가를 듣고 보니 아쉽다. 더 보여드릴 걸 그랬다.
-개봉 전부터 작품에 대한 기대가 크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된 것부터 봉준호 감독의 극찬이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거 같다.(웃음)
그렇다. 처음엔 영화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길 바랐다.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평가를 맡기고 싶었다. 기대에 따른 실망이 두려웠던 거 같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덕분에 홍보 효과를 본 것도 있다. 기대만큼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한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연출부 출신인 유재선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함께 작업한 소감을 전하면?
봉준호 감독님과 작업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평가가 조심스럽다. 작품에 합류하기 전 ‘옥자’ 연출부였던 감독님의 작품이란 이야기만 들었다. 그게 ‘잠’을 선택한 이유는 결코 아니다. 일단 시나리오가 술술 읽혔다. 그동안 맡아본 바 없는 결의 캐릭터였다. 과연 제가 이 캐릭터를 해낼 수 있을까 싶었고, 감독님이 어떻게 이야기를 그려나갈지도 궁금해서 출연을 결정했다. 신인 감독과의 작업? 다를 게 없다. 감독의 경력이 제겐 중요하지 않다. 이번 작품 또한 감독님의 디렉션을 따라가면서 수진을 연기했다.
-이선균과는 네 번째 호흡이었다. (정유미는 앞서 ‘첩첩산중’,’옥희의 영화’,’우리선희’ 등 세 작품에서 이선균과 만난 바 있다.)
함께 있는 자체로 편했다. 믿고 가는 부분이 많았던 거 같다. 이선균 배우는 여러모로 대단하다. 시나리오상 평면적으로 표현된 부분에 연기를 입혀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매 작품마다 인생 캐릭터를 경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더라.
-수진을 연기하는 데 있어 주안점을 둔 부분은?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했다.(웃음) 물론 배우로서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할지 머릿속에 그렸다. 하지만 제 해석에 의미를 크게 부여하진 않는다. 제가 해석한 수진을 바탕으로, 디렉션에 충실했다. 항상 감독님이 내주시는 문제를 잘 풀고 싶다. 감독님이 요구하는 바를 잘 해내는 게 배우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광기 어린 연기에 도전했는데, 감정 소모가 상당했을 거 같다.
칸에서 처음 완성작을 보면서 놀랐다.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하지 않는 편이라서 그런 얼굴이 담겼는지 몰랐다. 그날그날 상황에 맞춰 촬영에 임했다. 매일 경기를 뛰는 느낌이었다. 현장에선 깊은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촬영장 세팅이 끝나면 바로 연기했다. 감정 소모는 글쎄, 시간이 흐르면서 연기하는 순간과 정유미의 삶을 분리하게 됐다. 캐릭터에 극도로 몰입하면 너무 힘들다. 어느 순간부터 소위 ‘직장인 마인드’를 탑재하게 됐다. 촬영이 끝나는 순간 털어 버린다. 그게 다음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더라.
-솔직하다.(웃음)
이전엔 공식 석상에서 말을 하는 게 어색했다. 당시에는 솔직하게 답했는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는 거다. 그래서 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말로 제 연기를 설명하는 게 부끄럽더라. 연기자는 연기로 보여주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자리가 좀 편해졌다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 영화를 함께 책임지는 입장에서 필요한 순간엔 말을 해야 하더라.
-‘로맨스가 필요해2’, ‘연애의 발견’ 등 ‘로코퀸’ 정유미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대중이 있다.
매해 여름이 되면 두 작품을 촬영했던 날이 떠오른다. 두 작품 모두 여름에 촬영했다. 그래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그 시절의 사진을 올려보곤 한다. 로맨스 코미디? (작품을) 주면하겠다.(웃음)
-‘서진이네’, ‘윤식당’ 시리즈 등 예능 출연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컸다. 그런데 함께한 출연진과 긴밀해지는 재미가 있더라. 불러줄 때 열심히 하려고 한다. 연기와 다른 작업이지만, 예능도 연기만큼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집중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감사했고, 재미있게 그려져서 자신감이 생겼다. 또 그 자신감이 연기를 할 때 도움이 된다.
-어느덧 데뷔 18년 차를 맞이했는데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가?
지나간 날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한다. 예전에는 ‘이런 연기를 하는 배우가 돼야지’, ‘이런 배우를 목표로 삼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없다. 당장 제게 주어진 기회, 시간을 잘 보내고 싶고, 갖고 있는 에너지를 좋은 데 잘 쓰고 싶다.
‘잠’은 오는 9월 6일 개봉 예정이다.
김연주 기자 yeonjuk@tvreport.co.kr /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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