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리포트=김은정 기자]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는 리듬이 되고, 기억 속에 남을 이야기가 시작된다.
연극 ‘온 더 비트’는 ‘아드리앙’이라는 소년과 드럼에 대한 이야기다. 프랑스 배우 쎄드릭 샤퓌(Cédric Chapuis)가 직접 쓰고, 연기한 작품으로 지난 2003년 프랑스에서 초연됐다. 2016년 몰리에르 1인극상에 후보로 올랐고, 2021년 오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는 최고의 1인극상을 수상한 화제작이다. 국내에서는 TV 드라마에서 신스틸러로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낸 배우 강기둥, 윤나무가 아드리앙 역으로 더블 캐스팅되어 처음 관객들과 만난다.
“기억은 잊어도 느낌, 분위기는 남잖아요.“
작품은 드럼 소리로 세상을 듣고 보고 생각하는 아드리앙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드리앙은 자신만의 특별한 세계를 구축했다. 공을 튀기는 소리, 부엌에서 들려오는 칼질 소리 등이 모두 그의 세상에서는 리듬으로 변환된다. 심지어 선생님한테 뺨을 맞는 순간까지도 박자와 리듬을 떠올린다. 일상의 단순한 부딪힘과 두드림에서 출발한 아드리앙의 세상은 드럼과의 만남을 통해 확장된다.
무대 위에는 단 한 명의 배우와 드럼세트만 존재한다. 극의 이해를 돕는 세트나 특별한 장치는 없다. 드럼은 악기로서의 존재를 넘어 배우와 교감하는 상대이며 일종의 소통 창구이자 표현법이다. 작품은 소통의 다양한 방법에 대한 존중과 그 상징으로 소리와 리듬을 사용한다. 드럼이 내는 사운드는 소리이기에 앞서 ‘언어’로서의 연주다.
아드리앙의 이야기는 직설적이면서도 소박하다. 이리저리 무대를 누비며 빠른 호흡으로 관객을 매료한다. 여기에 언어가 된 소리는 감각적이고 미세한 감정을 전달한다. 어느새 공연장은 그의 세상으로 물든다.
박자와 리듬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아드리앙. 드럼은 고립된 그의 세상 속 유일한 친구였을까? 어쩌면 드럼은 단지 매개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드럼을 통해 스스로 음표가 되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거니는 진정한 향유자였을지도.
”우리의 삶도 음표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음악은 여러 음표가 모여 완성된다. 각 음은 다른 소리를 내며 악보 위 자리도 다르다. 우리의 삶은 여러 음표의 다채로운 소리로 이뤄져 있다. 개인의 인생, 집단, 사회, 그리고 이 세계가 전부 그렇다. 악기가 없어도 소리를 낼 수 있는 드럼. 두드림과 파장이 만드는 음 하나하나가 모여 음악이 완성되고, 그것은 곧 우리의 이야기다.
관객은 작품을 통해 각기 다른 메시지를 품는다. 어차피 분위기와 느낌만 남을 테니. 누군가는 배우의 열연을, 어떤 이는 드럼 연주를, 또 다른 이는 흐릿한 잔상으로 감각만 기억할 것이다.
커튼콜에서 배우가 선사하는 자유로운 몸짓은 마치 강렬하게 생(生)을 표현하는 것 같다. 윤나무가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음표로 만들었다면, 강기둥은 박수를 유도해 모두가 드럼을 연주하게 만들며 잠시 아드리앙의 세상을 느끼게 했다.
강기둥과 윤나무는 전혀 다른 색으로 무대를 물들인다. JTBC 화제작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서태지, 안재욱, 문희준 등으로 분하던 잔망둥이 강기둥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관객의 시선을 모두 쓸어 담아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남다른 흡인력으로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지루할 틈 없도록 속도감 있는 전개를 펼친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등에 출연한 윤나무는 무대 위에 없다. 그저 아드리앙만 존재한다. 명실상부 ‘1인극의 장인’인 그는 오롯이 배역으로서 관객을 마주하다가 커튼콜 마지막에서야 잠시 본연의 모습으로 등장, 전율을 선사한다.
두 사람의 연기는 TV 드라마에서 보던 배역에 한정된 모습과 다르다. 1인극의 특성상, 배우는 캐릭터이자 화자이며 퍼포머다. 텅빈 무대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극을 이끄는 배우의 매력은 손꼽아 말할 수 없다. 긴 시간 연습한 드럼 연주로 관객과 소통하며 새로운 세상에 초대되는 특별한 경험, 그 이끌림은 ‘온 더 비트’에서만 느낄 수 있다.
한편, 연극 ‘온 더 비트’는 오는 2023년 1월 1일까지 대학로 TOM 2관에서 공연한다.
김은정 기자 ekim@tvreport.co.kr / 사진=커넥티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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