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희, 납치에서 탈출까지 그리고 김정일기사입력 2011-05-18 18:28:24




[TV리포트 윤상길의 OLD&NEW] 1978년 1월 11일. 당대 최고의 스타 최은희씨가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영화사와 합작영화 ‘양귀비’ 제작 문제를 협의하고, 그가 운영하던 안양예고와 홍콩 현지 학교의 자매결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 53살 때의 일이다.



사흘 후인 1월 14일 최은희씨는 묵고 있던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된 것이다. 당시 행방불명된 최은희를 찾아 나섰던 현지 수사 당국은 명확한 납치 증거를 제시하지도 못한 채 ‘괴한들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갔다’라고 막연하게 결론을 내렸다.



사건 전 해(1977년) 최은희씨와 이혼한 신상옥 감독이 그를 찾아 나섰다. 신필름 홍콩지사로부터 최은희씨 납치 사실을 전해들은 신 감독은 1월 27일 홍콩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무려 6개월 동안 미국, 프랑스, 일본, 동남아 등을 돌며 최은희씨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7월 14일 홍콩으로 돌아온 뒤 19일 납북된다.



그들 부부의 납북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6년의 시간이 지난 1984년 4월 2일. 이날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사전 계획에 의해 두 사람이 납북됐다”면서 “홍콩에서 암약하던 북한 공작원 이상희 여인이 하수인인 신필름 홍콩지사장 김규화를 시켜 영화 브로커인 중국인 왕동일을 매수하여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해 납치했다”고 발표했다.



홍콩과 국내 수사기관은 이 사건을 북한 지령을 받은 홍콩 거주 이상희 여인과 이 여인의 사주를 받은 교포 김규화(당시 신필름 홍콩지사장) 및 중국인 왕진일 등의 음모에 의한 납치로 규정, 김규화를 반공법과 여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실형을 선고했다.



최은희씨가 뒷날 밝힌 납치 당시 상황은 이렇다. “커다란 화물선이었다. 선원들 이외에 승선된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홍콩 영해를 벗어나 배는 북한으로 향했다. 내가 계속 울부짖자 그들은 주사를 놓아 잠을 재우고 또 깨면 주사를 놓고 잠재우기를 반복하며 8일간 항해했다. 8일째 되던 날 멀리 남포항이 보이는데 이제 죽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도착한 남포항에는 38살의 김정일(당시 노동당 선전선동비서)이 직접 마중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광이었던 그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는 사실은 최은희에 대한 김정일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읽게 하는 대목이다.



이후 5년간 최은희는 안가에서 각별한 보호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해에 납치된 부부가 5년 동안 북한 땅에서 서로 소식도 모른 채 떨어져 살았던 것이다. 북한은 당시 최은희의 행방을 묻는 신 감독에게 남측의 중앙정보부가 최은희를 살해했다며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뗀 것으로 전해진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인 1983년 여름, 두 사람은 평양에서 운명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왜 그들 부부가 떨어져 살았는지에 대해선 그들 부부도 모른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어떻게 된 거야?”라며 웃었다고 최은희씨는 뒷날 회상한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김정일의 주선으로 북한 최초의 현대적 영화 제작에 들어간다. 약 2년 3개월 동안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는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은 밀사’, ‘소금’, ‘탈출기’ 등 다수의 영화를 제작하게 되고 국제무대에서 인정도 받았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최고의 영화인으로 대우받았다. 영화에 대해서라면 무한 지원을 받았고, 검열도 따로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최은희씨는 “김정일이 좋으면 그것으로 O.K였다. 김정일은 문화 예술에 관심이 깊었다”라고 밝혔다.



최은희는 1985년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북한영화 ‘소금’의 주연배우로 출연해 그해 구 소련에서 열린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북한 영화로 출품됐지만 한국인 최초의 해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기록된 사건이다.



대외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기회가 생기자 두 사람은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동구권 여행이 허락된 틈을 이용했다. 198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북한 영화인 자격으로 부부가 참가했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스트리아에 들른 이들은 동행한 감시원이 방심한 사이 탈출을 감행했다.



1986년 3월 13일의 일이다. 평양으로 가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 공항으로 향하던 중 미국대사관 앞을 지날 때 달리는 택시에서 구르듯 뛰어내린 것. 사전에 협조가 약속된 일본 교도통신 기자 등이 함께 뛰었다.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간 부부는 곧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그리고 미국은 그들의 망명을 허락하고 곧 미국 워싱턴 안가에 망명처를 제공했다.



북한 탈출 후에도 그들 부부는 3년간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미국에 체류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이들 부부를 한국으로 오도록 했으나, 그들은 반공순회강연회 같은 데에 불려 다니기 싫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88년 귀국하려 했으나 이번엔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민감해진 정부의 만류로 무산됐다. 그리고 89년, 납치 11년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이들 부부는 노년의 생을 보내며 또 다른 영화 인생을 시작한다. 대한항공(KAL)기 폭파사건을 다룬 ‘마유미’(1990년)를 제작했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을 다룬 ‘증발’(1994년)등을 발표했다. 신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말년까지 계속되어 2003년 안양신필름예술센터를 설립하고, 동아방송대학 석좌교수로 재직하는 등 한국 영화 발전과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2006년 4월 11일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별세한 신 감독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현재 최은희씨는 가업을 이어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아들 신정균 감독 내외와 손녀딸과 함께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살고 있다. 신상옥 감독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공주 ‘신상옥청년영화제’의 정신적 지주로 영화와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타임’지 김정일 관련 기사와 연결시켜 많은 사람이 최은희씨를 떠올리는 현실을 보면서 “때론 배우들의 삶은 그들의 영화만큼 극적이다. 그중 이 여배우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도 없을 듯하다”는 한 영화인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사진=영화 '성춘향' 스틸컷, 신상옥 감독 마지막 저서 표지



윤상길 편집위원 yoonsk4u@tvreport.co.kr